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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구원 프로젝트
설교본문 요 19:30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3-18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318m.mp3

20180318m

요 19:30

구원의 프로젝트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주님은 유대인입니다. 정작 유대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를 믿지는 않습니다. 2015년 현재 세계 인구가 59억 명입니다. 신구교 인구가 21억 명입니다. 21억에서 90프로 이상이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은 살인자 바라바보다 예수를 더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그의 핏값을 자기들에게 돌리라고 합니다. 주후 70년에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디아스포라가 됩니다. 한 때 그들은 히틀러에게 600만이 살해됩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독일의 다카우는 유대인 강제수용소가 있던 곳입니다. 다카우에서는 10년간 무려 20만이 가스실에서 살해당합니다. 그 시신을 처리할 때 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어 군 보급품으로 사용했습니다. 금니로는 금괴를 만들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뱀과는 살아도 유대인과는 못 살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왜 그들이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증오했을까요? 믿거나 말거나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히틀러도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거명하며 유대인들을 증오합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왜 그토록 미워했을까요? 메시아관, 구원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구원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죄인들은 벌하고, 의인들은 상을 주어야 맞습니다. 어떻게 죄인은 용서하고 구원하면서 의인은 정죄하고 고발합니까? 주님은 실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창녀, 세리, 가난한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을 상대하셨습니다. 반면에 의인을 자처하던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주님은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이 증오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겁니다. 


주님 십자가 사건의 주범은 누구일까요? 유대인들일까요? 유럽 사람들과 히틀러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재판한 빌라도가 주범일까요? 주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입니까? 아닙니다. 주님 십자가의 진정한 주범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대로 주님을 십자가에 다셨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기약대로’는 하나님의 뜻, 예정대로 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철저한 계획이었는지 알면 알수록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요한복음 19장 28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내서 목마른 게 아니라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목마르다고 했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이토록 정밀하게 하나님의 사전 계획대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사람이 죽을 때 숨이 떨어져야 고개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주님을 보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나서 영혼이 떠납니다. 우리는 디테일한 이 부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 준비되었으니 내 영혼을 데려가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는 선언도 마찬가집니다. 그 직전에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분이 이제는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린 사건이라면, 이제 다 끝났다 망했다고 해야 앞뒤가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 성취했다, 다 성공했다고 합니다. 유사 이래 가장 끔찍하게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는 분이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원망하던 분이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인간 구원의 프로젝트를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은 주님의 장엄한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얘기치 못한 변수로 실패로 끝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관철한 인간 구원의 대서사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인간 구원 프로젝트가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12절입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십자가라는 방식이 너무도 기상천외해서 하늘의 천사들도 신기해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까? 우선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의 첫째는 공의입니다. 절대적으로 공평하고 의로운 품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 재판관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죄를 간과할 수 없는 분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죄에 대해 벌을 내리고, 선에 대해서는 상을 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범하면 하나님의 품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원죄를 쓰고 납니다. 사람은 깨끗하게 태어나 죄를 범해서 죄인이 아닙니다.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고, 그래서 불가항력적으로 죄에 대해 무한 친화력을 지닙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공의로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운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속성도 지닙니다. 사랑도 공의만큼이나 절대적인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사의한 사랑이고,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서신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정의합니다. 


공의를 내세워 모든 사람을 심판하자니 사랑에 걸리고, 사랑하자니 공의에 저촉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딜렘마입니다.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속성의 첨예한 대립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두 속성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의 제3의 속성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 그 자체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이 구약 지혜문학의 대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현하는 십자가 해법을 착상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을 충족시킨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거기에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의인으로 죽은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진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모든 죄를 주님의 그 어깨에 짊어지게 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했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라는 수직 기둥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수평 기둥이 교차한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벽히 조화되고 관철되고 성취된 완전한 구속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자기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도, 자랑하지도, 절하지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도 바울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우리도 그런 고백과 다짐으로 진정한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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