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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섭리신앙
설교본문 빌 1:12-2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3-04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304m.mp3



20180304m

빌 1:12-21

섭리신앙


(빌 1:12-21, 개정)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우연이란 말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모든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삶에는 그 무엇 하나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 아닌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사정이나 형편은 최종 선을 향해 가는 도상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수용하고 확신하는 것이 섭리신앙입니다. 


섭리신앙이란 절대 우연은 없고 삶의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요 경륜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섭리신앙의 대가로 요셉을 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45장 3절 이하입니다.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어떻게 형들이 동생을 돈 받고 노예로 팔 수 있습니까?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 억울한 옥살이까지 합니다. 시편 105편 18절은 요셉의 옥살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의 영혼이 쇠사슬에 매여 있었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기적처럼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형들과 마주칩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 형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까지 왔고, 요셉은 그 사이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형들과 맞닥뜨립니다. 형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시나무 떨 듯 하는데, 요셉은 방성대곡하며 형들이 나를 팔아서가 하나님이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섭리신앙의 극치입니다. 요셉은 인륜을 범한 형들의 범죄까지도 다 심오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수용하며 절대 형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보복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그 어떤 사건도 우연이나 실수가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합니다. 이것이 섭리신앙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 아닌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사건은 없습니다.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섭리신앙으로만 지금의 혹독한 현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약의 섭리신앙의 대가는 바울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처지와 환경과 시련을 무섭도록 철저하게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수용한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용감했고, 담대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빌립보서로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의 주제는 놀랍게도 기쁨입니다. 감옥과 기쁨은 서로 상반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라는 말이 20번도 더 나옵니다. 그것은 바울의 허세나 과장, 위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의 위대한 섭리신앙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쁘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것을 말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용하고 적용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그가 당한 일은 투옥 사건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투옥을 절대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투옥 당하면 누구나 낙심과 원망, 비관, 초조, 의기소침해야 맞는데 바울은 추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투옥사건이 복음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다며 기뻐했습니다. 13절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시위대는 로마 황제를 경호하는 근위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위대 안에도 그리스도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투옥을 복음 전파의 한 방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옥중서신인 골로새서 4장을 보면 바울의 확신은 더욱 분명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3) 바울은 옥에서 나오기를 기도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당시 바울이 겪은 인간관계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집니다. 본문 15절 이하입니다.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7절에서 바울이 가리키는 그들은 참으로 고약하고 잔인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동료로서 바울에게 괴로움을 주려고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니 범죄자라고 하면서 바울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에 기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섭리신앙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전파되면 된다는 것, 이것은 바울이 진심이자 섭리신앙입니다. 


바울의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바울은 형기를 마치면 출소하는 죄수가 아니라 언제 참수당할 지 모르는 사형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측은하고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바울의 모습이나 정서에는 어디에도 사형수로서의 어둔 그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죽음의 공포나 체념, 불안한 기색이 없습니다. 대체 이것은 어디에서 온 초연함일까요? 20절 이하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존귀하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주님의 섭리와 처분만을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까지 이토록 철저하게 주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어거스틴이 열병으로 혼절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주님이 그에게 ‘아들아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낫고자 하느냐? 살고자 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렇게 답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 원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오직 주님의 처분만을 바랍니다.’ 다음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떴는데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고 합니다. 


독일의 어느 유명한 백작이 자신의 지위, 재물을 다 포기하고 가난한 자에게 재산을 다 나눠줍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맨발로 거리에 나섭니다. 사람들이 다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은 아직도 부요하다고 하면서, 자신은 더 가난하고 처절하게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저 유명한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 진첸도르프 백작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감옥도, 동료의 배신도, 헐벗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 어느 것도 불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저 기쁘고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당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 믿으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되게 하십니다. 요셉의 섭리신앙이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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