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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주님의 고독
설교본문 요 16:32-33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2-25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225m.mp3

20180225m 

요 16:32-33

주님의 고독


(요 16:32-33, 개정)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창조를 하시면서 그때마다 당신의 소감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둘째 날 궁창을 만들 때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셋째 날과 넷째 날, 다섯째 날에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18절을 보면, 오히려 좋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사람이 혼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게 고독해 보여 좋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고독에 대한 처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하여 짝을 이뤄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이란 원래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혼자는 고독해서 못 산다는 겁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짝이 있어야, 반려가 있어야 고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부부라는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남녀가 함께 살기 전에는 혼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인간은 고독한 존재로 태어났는데, 하나님이 그 고독을 이기게 하시려고 짝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칼 융이나 폴 틸리히 같은 학자가 분석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두 가지 원초적인 그리움이 있습니다. 우선 인간은 무에서 왔기 때문에 느끼는 허무입니다. 이것은 무에 대한 향수, 귀소본능입니다. 그 허무에 유혹과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안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극복되지 못하면, 자살에 이릅니다. 또 한 가지 사람에게 원초적인 정서는, 사람은 원래 홀로 태어났기에 고독에 대한 향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습니다. 하와가 없을 때 겪었던 원초적 고독 때문에 외로움을 탑니다. 남자들은 몰래 고독에 운다고 합니다. 실제 아담과 하와도 하나는커녕 늘 각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각각 다르게 판단하십니다. 한 몸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둘이고, 한 공간 안에 살지만 결국 각각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부부의 정의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는 그 고독이 극복된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을 때는 고독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자 나뭇잎으로 하체를 가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찾자 숨었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도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기만의 비밀을 홀로 간직한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내 인생 대신 살아주지 못하고, 내 아픔을 대신 아파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다 제 혼자 떠나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 혼자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실존적인 허무와 고독이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한권사님이 티켓을 구해주어서 이미자 쇼에 갔습니다. 콘서트 중에 이미자 씨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분은 남들이 자신은 고독하지 않게 60년 가수생활을 한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나이 많이 먹고 나와서 노래 부르는 걸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내년에도 또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절대 연예인이라고 외롭지 않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 고독한 존재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도 참 외로우셨습니다. 주님과 제자가 같이 생활했지만, 늘 주님과 제자는 다른 세계에 살았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어찌 눈이 있어 이것을 보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하시며 제자들도 나늘 버리고,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렸다는 고독의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성큼 현실로 다가온 그때 주님의 심경이 어떠했을까요? 이때야 말로 가장 위로가 필요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다들 주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외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바울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좀체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디모데후서에서는 자신의 외로움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겨울 전에 어서 오라”(딤후 4:21) 바울은 로마 지하 감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동역자들이 다 자기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제아무리 순교적 믿음으로 살던 바울이라 하더라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독을 이기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고독합니다. 우리 교회 연세 드신 어르신들 얼마나 인생이 쓸쓸하십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 고독을 어떻게 이기셨을까요? 우선 다 나를 버리고 떠나도 아버지는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견디고 이기셨습니다. 32절 하반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나님만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 무서운 고독을 이기게 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스폿 라이트를 받는다 해도 하나님이 없으면 내 삶은 공허합니다. 그러나 다 나를 떠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더는 외롭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합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다 떠납니다. 단지 시한부로 내 곁에 머물 뿐입니다. 영원토록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영원한 반려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은 주님의 빈말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그냥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믿읍시다. 주님의 이 약속에 대한 엄숙히 확실할 때 우리는 고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고독을 이깁시다.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세가 갑자기 사망합니다. 가장 황당했던 사람은 여호수아였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않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고독은 내가 혼자라는 소외감이기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반드시 그 고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며 고독을 이겼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주님의 긴 기도입니다. 1절부터 26절까지 기도가 이어집니다. 주님은 외로울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사실 고독할 때 할 수 있습니다. 고독할 때 기도는 정직해 집니다. 우리가 남 앞에서 기도하니 자꾸만 치장하게 되지 골방에 들어가 홀로 기도하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골방에 들어가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독하기에 기도하셨고, 기도하기 위해 고독을 자처하셨습니다. 주님은 40일 광야 금식기도 때도, 십자가 위에서도 고독하셨고, 때때로 기도하러 조용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외로우십니까? 주님처럼 기도하십시오. 고독은 씹으라고 있는 게 아니라 기도하라고 있습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소통입니다. 옛날 연애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무슨 화제든 마냥 즐겁습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애인과 만나고 있는데, 외롭다거나 고독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기도는 그렇게 주님과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의 밀어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결코 외롭지 않게 합니다. 특히 연세 드신 어른들은 더 많이 기도하십시오. 누구도 여러분께 말을 걸어주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과 기도로 대화하시면 끝까지 상대해 주십니다. 끝까지 주님은 진지하게 대화해 주십니다. 주님은 늙었다고 절대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바울도 말년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모두 바울을 떠났을 때, 바울은 주님의 함께 하심을 바랐습니다. 기도해야 외로움, 적막감, 소외감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고독을 이겼습니다. 요한복음 18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이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이 다음은 골고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독을 이기는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로, 겟세마네에서 골고다로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길을 열심히 걷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고독이 사치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분부하신 사명,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달란트를 깨닫고 그에 충실하며 응답하며 사는 사람은 절대 고독이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도 달려갈 길을 가느라 고독에 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주님도 아버지의 일을 다 이루기까지 고난의 길을 가셨기에, 인간적으로 볼 때는 고독의 화신처럼 보였으나, 정작 본인은 고독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힘껏 갑시다. 기드론에서 겟세마네로, 거기서 또 골고다의 좁은 길로 주님처럼 나아갑시다. 주님도 그 길을 열심히 가셨기에 고독에 발목 잡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성공적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고독이 무엇인지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서 고독을 철저히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우리의 고독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며 동정하십니다. 


본문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은 세상을 이기고,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함으로 이겼고, 기도하며 이기셨고, 열심히 하나님이 마련하신 길을 걸으며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과 고독을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께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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