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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과 요한복음 9장의 본문은 각각 그 컨텍스트는 다르면서도 동일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의 본문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빌라도 총독이 몇몇 갈릴리 사람들을 처치하여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었다는 끔찍한 얘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예수님님은 느닷없이 빌라도에게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이나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들이 결코 남달리 죄가 많아 그런 불행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님의 이런 반응을 통해 무엇보다도 그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빌라도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이야말로 그들이 지은 죄 값을 받은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본문에도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님에게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고 묻고 있습니다. 본인의 죄냐, 부모의 죄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 역시도 소경 된 것은 죄 때문이라는 사

실을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한 물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케이스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두 질문이 모두 이른바 교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양자 모두가 인간의 불행은 죄 값이라는 종교적 고정관념을 거듭 확인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 모두는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응당 가져야 할 애도의 심정보다는 이미 자기가 지니고 있던 어떤 관념과 마주 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의 불행 당한 사람들이란 더 이상 한 인격이거나 이웃이 아니라 한갓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관념을 더욱 굳혀 주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같은 질문에는 으례히 “나는 너와는 다르며 무죄하다”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의 비극이 죄 값이라면 현재 그러한 불행 속에 있지 않은 자기는 죄가 없거나 있어도 그들보다는 덜하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들은 불행 당한 이웃을 순수한 연민으로 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리를 논하는 사변의 자료로 삼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겁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지금까지 교리위주의 체질을 형성해 왔고 또 그것으로서 세계를 밀고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런 입장은 어쩔 수 없이 외적으로는 배타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내적으로는 이단을 규정하는데 혈안이 되어 마침내는 세계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종교가 되게 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교리 중심적인 사고는 성서를 보는데도 그대로 적용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성서 그 자체의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보다는 이미 규정해 놓은 교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용하려는 예가 더 많았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획일적인 결론

을 찾아냄으로써 성서 현실의 다양성을 무시해 온 게 사실입니다. 그런 교리 중심적인 눈은 복음서의 예수님상도 상당히 왜곡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마치 교파 창설자쯤으로 보자는 것이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모습은 오히려 재래적인 종교관념에 의해 자기를 상실하고 있는 자들의 인간회복을 위해 싸운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어느 모로 보나 예수님은 결코 틀에 박힌 듯한 종교인을 만들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 본연의 길,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을 제시하셨을 뿐입니다. 물론 관념이라는 것은 굳이 종교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늘 본문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점령국의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잡아 그 피를 제물에 섞은 사건을 실제 목격했거나 전해 들었을 때, 만일 희생된 그들이 당시 우범지대였던 갈릴리 지방의 정치범들이어서 빌라도가 경고의 본보기로 그렇게 처단한 것이라면 로마인들인 경우에는 잘 했다고 할 것이고 식민지의 설움 속에 사는 유대인들이라면 로마에 대한 증오심에 더욱 불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역시도 주목할 것은 두 입장이 똑같이 그 희생된 사람들의 불행 자체에서는 멀리 떠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불행의 주인공으로부터 정치적 민족감정이라는 관념으로 옮겨가고 만 것입니다.


자, 이번에는 다시 그렇게 희생된 자들의 부모나 자식의 경우를 상상해 봅니다. 어떤 사람은 복수의 칼을 들고 내달릴 수도 있을 테고 또 어떤 이는 마냥 슬퍼서 땅을 치며 통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유당 말기에 마산 앞 바다에서 경찰에 희생된 한 소년의 시체가 떠올라 419의 도화선이 됐다고 합니다. 시민과 학생들이 그 소년의 죽음에 분격해서 모두 들고일어난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 물어야 할 것은 그때 봉기한 시민 학생들이 정말 그 소년의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소년의 죽음이 한낱 이날까지의 그들의 울분의 도화선이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그 소년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민중봉기를 위한 제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더 엄격히 말하면 그 소년은 꼭 있어야 할 죽음을 잘 죽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의 어머니는 어떠했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그저 무한히 슬프기만 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 아들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기보다 “내 아들의 시체를 밟고 불의를 물리치기 위해 전진하시오!”라고 외쳤다면 그는 영웅적인 어머니라는 칭송을 받을는지 모르나 그럴 때는 이미 죽은 소년의 어머니가 아니라 한 집단을 위한 지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도 민중들이나 그 어머니는 바로 정의를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다는 어떤 관념에 사로잡힌 것이며 그 관념이 마침내는 그 소년을 인간의 죽음에서 한 기념탑으로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정의니 발전이니 이념이니 하는 따위의 관념이 지금 여기에 있는 한 인격을 당연한 제물로 알고 희생시키고도 도리어 그런 사소한 것을 위해 울지 말고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울기를 강요합니다. 이래서 역사는 언제나 유혈을 필연으로 하여 살인을 정당화해 왔다.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볼 때 인간의 본연성은 당연히 그를 불쌍히 생각하고 어떻게든 그를 돕고 싶다는 심정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고 묻게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가 만일 제 자식이었다고 해도 그런 질문이 가능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 값이라는 교리적 관념이 불행한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가로막듯이 관념이란 언제나 사람을 그 본연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대할 때는 늘 대상 그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나의 관념이 먼저 그와의 관계를 결정해 버립니다. 이것을 흔히 우리는 선입견이니 편견이니 하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서구인들에게는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특수한 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가 만일 유대인이면 이미 그는 인간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관념에서 경멸해 버린다. 왜 그래야 하는 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들의 반 유대 관념은 유대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금융계에 빨리 진출했다는 것과 그들이 바로 예수님님을 죽였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그것으로는 말이 되질 않습니다. 


이러한 맹목적인 고정관념은 각 민족간에도 있고 지방간, 계급간, 세대간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교권이나 정권 따위에 의해 정당화되고 이용될 때는 여지없이 악마화 됩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점령하고 그들의 상전 노릇을 하는 동안 그들이 챙겨 간 그리스도교는 백인들의 우월함을 정당화해 준 동시에 흑인들을 비인간화하는 도구가 되었고, 히틀러는 유럽인들의 반 유대관념을 이용해 독일민족을 온통 살인귀로 만들었습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재일 교포들에 대한 일본인의 감정 등은 모두가 주어진 그대로의 현실을 떠나서 사람이 만든 관념에 의해 조종되는 현상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님은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빌라도의 폭정에 희생된 사람들이나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것이 죄 값이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분명히 거부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낡은 종교적 관념, 일체의 선입견과 편견에 대한 파격적이고도 무서운 도전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이렇게 망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님이 ‘죄 값은 사망’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그것이 너와 나와의 관계를 가로막는 관념으로 고착될 때 그것을 제거하여 인간을 그 본연성에로 복귀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님의 이러한 의도가 보다 뚜렷이 드러난 곳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에게 기습을 당해 쓰러져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떠났다는 것으로 보면 유대인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레위인과 제사장은 그를 보고도 그대로 지나갔다. 왜 그랬겠는가? 우리는 그들이 우선 직업적인 종교인이라는 점에서 어떤 종교관념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대로 지나친 것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는 율법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비해 사마리아인은 쓰러져 있는 자를 보고 그냥 ‘측은한 마음’이 들어 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비유의 전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한 동기에 대해 그냥 ‘측은한 맘’에서라는 단순한 서술 뿐 그 어떤 종교적인 변호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행위에서 굳이 어떤 종교적인 동기를 찾으려던 재래의 해석들은 모두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히려 당시 그가 정말 어떤 종교적인 관념을 발동했다면 그는 결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까닭은 강도 만난 자가 실제 유대인이었다면 그는 바로 자기와는 종교적인 원수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어떤 관념에도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앞에 있는 참상이 그대로 그를 움직이는 언어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간 본연의 심성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것을 개념화함으로써 인식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관념화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관계란 거리에 쓰러져 있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처럼 상대의 정체도 모르고 갑자기 뛰어든 경우만이 아니라 복잡한 관련에 엉켜 지속적으로 만나는 관계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와의 관계에서 얻은 경험이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나의 관념을 형성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다시 불가피하게 나와 그와의 관계에 개입됩니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를 가로막는 관념을 제거하고 인간 본연의 심성에서 서로를 마주 대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것은 바로 과거로부터 탈출하여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즉 미래의 빛 속에서 너와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소경을 본 제자들은 저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바로 과거로서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관념화의 길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을 두고도 예수님의 시각은 180도 다릅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에게서 나타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입니다.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입니다. 즉 사람을 보되 과거에서 보지 않고 미래에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필연성이 아니라 언제나 가능성만 비칩니다. 간음하다 그 현장에서 덜미 잡혀 온 여인을 두고 흥분한 군중들은 모두 손에 손에 돌을 들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당장 쳐죽여야 한다고 악을 썼습니다. 이렇게 그들 모두가 종교관념의 화신이 되어 오로지 과거로서만 현재를 심판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분노에 찬 무리를 향해 “그래, 그렇게 하

되 다만 과거에 죄짓지 않은 자부터 돌을 던지라”고 함으로써 그들을 물리친다. 그리고 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 여인의 범죄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너는 비록 과거는 더럽다고 하더라도 미래에는 누구보다도 성결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예수님님이 온갖 어지러운 고정관념으로부터 그렇게도 분명히 놓여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당시의 종교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죄인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영접하고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을 과거에서가 아니라 미래에서 보았기 때문이요, 살아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빛 앞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경을 보되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장차 그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읽었던 예수님의 태도가 바로 그런 그의 기본 입장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오늘 우리들의 감격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과거로 말한다면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돌에 맞아 마땅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에서, 가능성의 눈으로 우리를 주시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그분 앞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어떻게 하면 우리가 헛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인간본연의 심성으로 이웃을 대할 수 있을지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