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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 없는 인간, 그것이 바로 성서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일까요?. 희랍의 스토아 철학이나 동양의 도인사상에서는 분명 용기 혹은 용감성을 대 덕목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그러나 실상 성서에는 그것에 반대되는 권고가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신약에만 해도 “두려운 마음으로 살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있고 따라서 키엘케고르 같은 사람은 「두려움과 떨림」을 신앙인의 특성중의 하나로 내세우며 그것을 자기가 쓴 한 책의 표제로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은 도리어 “두려워 말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자들이란 “두려워하라”와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 성서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며, 또 무엇을 “두려워하라”는 것인가. 또 매사에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는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면서 당부하신 말씀인데, 그런 부탁의 배후에는 이미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어두운 역사적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보라! 내가 너희를 내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신 말씀에서도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치 양을 이리 속에 보내는 것과 같은 경우라면 당연히 극도로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님은 그 구체적인 공포의 대상이 바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각별히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며 “총독들과 왕들에게로 끌고 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정이란 유대민족의 공회, 즉 산헤드린을 말합니다. 당시의 이 산헤드린은 로마 정부의 허용 아래 대제사장을 머리로 제사장 족속들, 장로들, 그리고 서기관 등 71명으로 구성된 지배체제로서 군사 문제와 대 로마 정치범을 제외한 모든 입법과 사법권을 장악한 기관이었습니다. 또 여기에 나오는 「회당」이란 바리새파가 주도하는 국민교육기관이고, 총독이란 헤게모니를 잡은 점령세력의 대표이며, 왕들이란 헤롯가의 제왕들이나 이방의 제왕들을 지칭한 것일 것입니다. 하여간 이것은 권력과 종교를 막론하고 지배층에 있는 모든 족속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횡포가 마침내 “형제가 형제를 죽는 자리에 넘겨주고, 아비가 또 자식을 그렇게 할 것이며, 자식도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만큼 극단 한 혼란과 불신과 증오와 도덕적인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이 그 같은  현실에서의 도피를 권고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계 속으로 열두 제자를 파견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런 살벌한 세상 속으로 보냄 받는 제자들에게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격려가 그렇게도 소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대체 어떤 근거로 그 같은 권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인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첫째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는 박해가 정당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모함과 거짓과 불의를 뒤집어쓰고 당하는 억울한 수난임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의 진실이 반드시 밝혀지고, 그 진실을 왜곡한 악한 세력의 음모도 반드시 백일하에 드러날 터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신념은 역사나 자연의 법칙을 믿어서가 아니라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온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시비를 가려냅니다. 그는 분명히 그러한 때를 약속했습니다. 만약 그러한 때가 없다면 목을 걸고라도 진실과 참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실은 바울의 표현처럼 가장 불쌍하고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쓸 것과 못 쓸 것을 가리듯 진실과 거짓을 밝힐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므로 마치 모순과 어두움이 영원히 지속되기나 할 듯이 그렇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비록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기에”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무슨 사람들에게 인간의 육체까지는 죽일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기라도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제 아무리 잔학한 박해를 가한다고 해도 인간의 육체 그 이상은 침범할 수 없다는 뚜렷한 한계성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런 이해만으로 잔인한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체 역시도 자기 존재의 한 부분임이 틀림없고, 육체에 가해지는 박해 역시 제 스스로가 당해야 하는 현실적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조 점은 정작 그 다음에 있습니다. 즉 몸과 영혼을 함께 없앨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에는 “두려워 말라”는 말은 세 번씩 반복되고 있는데 반해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여기에 딱 한번 나오고 있습니다. 인간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이는 오직 한 분! 그분이 바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두려움이 인간에 대한 상대적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봅니다.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권력과 막강한 공권력을 휘두르며 가해 오는 그들의 박해가 정말 무섭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두려운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나의 궁극적인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와의 단절이란 나의 영과 육의 영원한 멸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사람들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 위축된다는 것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그 분을 망각한데서 온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그러나 내 존재 전체와 관련된 그 분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나는 상대적인 것이 주는 위협 앞에서 오금을 못 펴던 비겁으로부터 해방되고, 지금까지는 마치 절대처럼 보이던 그 두려움도 내 앞에서 도깨비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죤 낙스의 묘비에는 “여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은 선교사가 누워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궁극적인 주권자로 아는 사람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절대 자기의 인간 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헨리 왕이 임석한 자리에서 파티머 감독이 설교를 하기위해 단위에 섰을 때 어떤 감독 하나가 “헨리 왕이 임석했으니 주의하시오”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또 “파티머야, 만왕의 왕이 여기 계시니 주의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더 이상 헨리 왕의 비위를 맞추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비겁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셋째 “참새 두 마리가 한 푼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중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반푼에 팔리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는 한 죽일 수 없다는 이 신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이로써 아까 말한 “사람들이 비록 몸을 죽일지라도”라는 게 실은 가정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동물에게는 푸쉬케, 즉 영혼이 없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들의 생사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좌우된다면 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한 인간의 육체를 죽이고 살리는 문제야말로 더 더욱 하나님의 섭리에 달린 것이 아니겠느냐는 확신에는 그 어떤 의심의 여지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뜻 들으면 이  말은 또 엉터리 같은 주장 같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가차없이 죽이는 인간역사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역사의 현상적인 단면과는 또 다른 믿음의 차원을 봅니다. 비록 악한에게 몰매를 맞아 죽는 경우라도 그 까닭은 이해할 수 없으나 하여간 하나님이 간여하지 않고 된 일은 하나도 없다는 신앙! 이런 신앙을 딛고선 자들에게는 사실 그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 권고와 위로의 말씀은 그저 단순히 두려워 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전부가 

아니고 그 배후에는 보다 적극적인 뜻이 있습니다. 즉 인간이 주는 상대적인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침내는 맡은 바 사명을 과감히 수행해 가라는 적극적인 명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어두운 데서 너희에게 말한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을 지붕 위에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박해의 때와 박해받는 상황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오히려  복음과 진리와 참을 더욱 소리 높여 증언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수난의 때일수록,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밝은데서 말하고, 높은데서 외치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두려움을 내쫓는 적극적인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진실, 내 속에 있는 참을 목을 내대서라도 증거 하겠다고 나서는 거기에서 실은 두려움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가 솟아날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물리적인 힘이나 구조적인 권력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그래서 진실을 빤히 보면서도 거짓에 동조하고 타협하는 비겁쟁이가 되는 데 그 까닭은 결국 정말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상대적인 것들에서 절대적인 공포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두려움이란 언제나 내가 집착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바로 절대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명예 앞에서는 그렇게도 나약해 질 수밖에 없고, 권력에 애착을 가진 사람은 권력이 또 절대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다 할 태세가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궁극적인 두려움의 대상으로 아는 사람은 결코 명예나 권력이나 돈 따위에 아첨하는 비겁쟁이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절대인 체 하는 상대적인 것들의 허구성을 밝은데서와 지붕 위에서 외치는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양을 이리에게로 보내는 심정으로 제자들을 극심한 박해의 현실 속에 들여보내시면서 “두려워 말라!”고 거듭 당부하신 예수님의 그 권면의 의미가 너무도 나약하게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이쯤에서 우리 각자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인도인의 해방을 위해 싸운 간디의 외마디는 언제나 “용감 하라! 감옥에 들어갈 각오만 하라!”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온통 두려움 속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건강에 대한 공포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자녀 교육 문제며 자녀들의 장래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 졸지에 닥칠 수도 있는 어떤 가정적인 불행라든가 또 불확실한 미래등 하여간 우리 주변에는 온통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만 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런 잡다한 두려움으로부터 놓여나 좀 기를 펴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참과 거짓을 심판하시고 우리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며 심지어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세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두려워 말라!”는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나를 두렵게 하는 내 삶의 조건들이란  그 무엇 하나도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따라서 그 분을 믿고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축복인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불안과 공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초조한 나날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또한 가장최대의 불행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두려움이란 바로 정작 두려워 해야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데서 온 불신앙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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