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01 22:25

역설의 기쁨(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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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빌4:4, 살전5:16).


그런데 이 권고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기뻐할 처지가 되어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뻐할 수 있는 처지에 이르면 누구나 그런 새삼스런 권고 없이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인간현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삶이란 결코 기뻐해야 할 것으로만 일관되어 있지 않고 기뻐해야 할 일과 고민해야 할 일들이 뒤엉킨 복잡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기뻐하는 것만이 미덕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슬퍼할 일로 꽉 차 있는 현실 속에서 남이 우는데 나 혼자 기뻐한다는 것은 오히려 삶을 조롱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하는 바울 자신도 실은 기뻐할 수 있는 측면보다 오히려 고난을 더 의식하고 있었으며, 또 그 사실을 스스로도 수차례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런 정도의 상식도 없이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한 것인가 아니면 그가 말하는 기쁨이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기쁨과는 다른 그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 기뻐하라”고 권하는 바울의 당시 처지가 어떠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우선 그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병이었는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무서운 두통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말라리아 혹은 안질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간질병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다마스커스 도상의 회심사건을 두고 실은 그것이 그의 지병인 간질의 발작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그 사건으로 인해 나타난 바울의 전인적인 삶의 변화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어집니다. 어쨌든 이런 구구한 설들은 모두가 추측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질병이 바울 자신의 표현대로 ‘마치 몸을 찌르는 가시’처럼 심각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병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질병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만을 준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의 병을 가리켜 “사탄의 사자”라고도 했습니다. 즉 그 병이 때로는 자기와 주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악마의 무서운 농간으로까지 보였다는 것입니다.


실제 당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 병이 하나의 저주처럼 보일 수 있었다는 가능성이 시사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내 육체에 여러분들에게 시험이 될 만한 조건이 있었으나 여러분들이 나를 멸시하지도, 침 뱉지도 않았다”며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당시 그 질병이 바울에게 얼마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고통을 주었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울이 처해있던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상황은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를 쓸 무렵에는 고린도교회 내부에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것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도전할 것을 선동하는 반동분자들이 생겨났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고, 결국 전반적인 분위기가 바울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통해 고린도 교회 교우들에게 자기의 사도 됨의 정당성을 증거 함으로써 자기가 전한 복음의 순수성과 신빙성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나선 이유 중 하나는 바울이 사람들 앞에서 몹시 나약하고, 말에 능력이 없다(고린도후서 10 :10, 11 :6)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이란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외적 권위와 말에 신비한 힘이 있어야 함에도 바울에게는 그런 것이 없으므로 그는 사도도 아니며 따라서 그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선 그들의 비난을 그대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말에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의 말에 조리가 없었다거나 내용이 없고, 설득력이 약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1 : 6을 보면 바울은 일단 자신에게 언변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지식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과 이점에 관한 한은 그의 대적 자들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여러 편지들과 사도행전의 전승 등을 볼 때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에 능력이 없다는 비난은 일반적인 의미의 구변을 뜻한 게 아니라 케제만이나 라이슈체타인의 해석처럼 당시 고린도 지방을 지배하던 헬레니즘의 신비주의에서처럼 이상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열광적인 언변술이 없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옳을 것 같습니다. 헬레니즘의 신비종교에서는 사람들을 황홀경으로 몰아가는 주술적인 웅변술을 곧 신의 영에 접한 증거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러한 환상적인 언변 술이 없었으므로 그에게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악선전했던 것입니다. 이런 처지는 확실히 바울로 하여금 뭔가 자신의 신비체험을 말하도록 강요하는 상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니게 아니라 바울은 실제 자신의 신비경험을 고백함으로써 악한 자들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고린도 교회 교우들을 보호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는 그 유혹을 물리치고 오히려 자신에게 더욱 불리할 수도 있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의 지병을 낫게 해 달라고 몇 차례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병이 낫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런 고백은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그의 사도권을 부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는 격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기도의 무응답이 실은 ‘신비한 계시’ 이상의 ‘놀라운 계시’였음을 깨달았다며 도리어 적극적인 공세로 나옵니다. 이를테면 기도하는 중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해 진다”는 깨달음을 얻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는 것인데 이는 분명 역설적인 계시이며 위대한 자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의 그 몹쓸 병이 주님의 사도가 아니기 때문도 아니고, 신의 벌도 아닌 오히려 그가 받은 많은 특수한 은혜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교만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주님의 세심한 배려라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실 왜 내게 이런 병이 있어야 하나? 이것은 곧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증거가 아닐까 하는 물음에 뚜렷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누구나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를 통해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가이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기쁨이란 그저 단순한 감정의 한 양태거나 혹은 현실의 엄연한 아픔을 두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어떤 황홀한 종교적 감정 따위를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체험하고 또 오늘 우리에게도 권하는 기쁨의 성격은 한마디로  ‘역설적인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기쁜 일이 있어서 뿐 아니라 심지어는 고통 중에도 기뻐하는, 그래서 이래도 저래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그 ‘역설적인 기쁨’이란 것이 정말 현실 속에서 가능한 것일까요.


기쁨과 즐거움을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사실 이런 개념들은 어원상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폴 틸리히는 현실 속에서는 얼마든지 자각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4: 19이하를 보면 바울이 ‘해산의 고통을 언급합니다. 해산은 몹시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게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즐겁지 않고, 또 고통스럽다고 해서 기쁨마저도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즉 고통과 기쁨은 동시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기쁨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사랑하고, 어떤 처지에서 사랑하느냐에 따라 때로 고통이 따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거기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의 고통이 즐거움은 앗아갈 수는 있어도 결코 기쁨마저 빼앗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즐거움만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할 수 없지만 진정한 사랑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고통도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같이 수난을 당해도, 손해를 봐도, 아픔 중에도 내가 기뻐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나의 사랑의 대상이 그 존재 자체로서 나를 꽉 채우고 있어야 합니다. 자식의 존재가 어머니의 의식을 가득 채우고 있다면 그 어머니는 자식을 위한 어떤 희생이나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의 존재 그 자체를 기뻐하지 않고, 자기 자식이 장차 자기를 잘 섬기고 호강시켜 줄 것을 기대하여 기뻐하는 경우라면 막상 그렇지 못한 처지가 될 때는 기쁨이고 뭐고 다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기쁨이란 순수하게 그 존재 자체를 기뻐할 때입니다. 예술가의 진정한 기쁨은 예술 자체에 도취했을 때 오는 것이지, 그 예술을 통해 돈이나 명예 따위를 얻으려는 계산을 앞세운다면 이미 참 기쁨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 사람의 목적일 때 기쁨이 있지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즐거움은 몰라도 기쁨은 체험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역설적인 기쁨이란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를 순수한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나의 존재 전체를 내 맡길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사랑의 기쁨이란 으례히 양면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는 내게 주어진 그 무엇에서 신의 사랑을 실감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반드시 주는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잃는 경우, 즉 고통을 당하는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그가 참 나의 사랑의 대상이라면 맞을 일이 있을 때는 맞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매, 사랑하는 이의 분노, 사랑하는 이의 강요에 쫓기는 희열도 느낄 줄 알아야 감히 항상 기뻐하라는 바울의 그 역설의 기쁨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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