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509

우물가의 해후

  요4:7-26


“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내 편의 신이!”


스스로 무신론자,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한 시인의 말입니다. 이는 신 같은 것은 아예 없다는 시위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자기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토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비록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망정 무신론자를 자처하면서 왜 신을 찾습니까. 이 시인은 허무주의를 자처함에도 자기의 소원에 대해 그렇게도 분명할 수가 없습니다. 내 편이 되어 달라는 것은 이미 자기의 욕구가 그만큼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독거미 같은 에고이스트입니다.


딱 버팅기고 앉아서 신마저도 움켜잡아 먹으려는 자세입니다. 일부러 신을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 편이 될 신을 찾게 마련입니다. 내 소원, 내 욕구를 들어주는 어떤 마력으로서의 신! 그것은 이미 신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인간이 찾아낸, 혹은 찾아간 신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육신이 된, 즉 신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복음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순수 인간이 되신 초월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이 선언은 당시의 두 가지 종교사상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 하나는 영지주의, 그노시스입니다. 그노시스는 철저한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종교 철학적인 사상으로 당시 그리스도교에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빛의 세계와 어두움의 세계,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엄격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빛이신 그리스도는 절대 어두움인 육이 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실제 인간이 되셨다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 대해 요한은 아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신이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유대교의 한 계열인 묵시문학파인데 그들은 유대교의 메시아 대망사상을 철저화하고 극대화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었지만 예사롭게 오거나 초라하게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굉장한 이변과 함께 최대의 영광의 주로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또한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아니! 그는  사람의 아들로 이미 이 땅에 왔으며 그로 인해 벌써 낡은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새 역사가 시작됐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들의 메시아 대망사상을 비신화화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입장을 그의 복음서를 통해 끝까지 관철하고 있습니다.


순수 인간 예수님 속에서 초월자를 본 것입니다. 차안에서 피안을 본 것입니다. 그의 이런 변증법적인, 역설적인 시각의 한 단면이 바로 수가성 우물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해후 가운데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초월자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이 된 초월자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초월자가 유대지방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박해를 피해 그의 본거지인 갈리리로 가는 도중 유대와 원수지간인 사마리아를 거치다 시장한 나머지 야곱의 우물가에 멈춰 서서 먹을 것을 사 오도록 제자들을 마을로 들여보냈습니다. 배고픈 줄을 알았던 초월자는 피곤한 줄도 알았습니다. 또 그는 목말랐습니다. 분명히 초월자였으나 인간이 가진 모든 한계를 그대로 지니고서 느끼고, 울고, 웃었던 그런 분이었습니다. 마침 그는 우물에 물 길러 나온 여인을 보고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구걸하는 초월자! 먼 여행에 지쳐 우물가에 걸터앉은 나그네!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빌리면 한 낯선 유대 사나이!


원래 요한은 역사적 예수님의 전기를 쓰려하지 않고 예수님님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그러나 또 요한만큼 예수님님의 인간적인 면을 과감하게 드러낸 이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우물가에서 목말라 물을 구걸하던 나그네는 그의 생의 극치인 십자가상에서도 “내가 목마르다!”고 절규합니다. 마지막  순간, 그 귀중한 순간을 보도하면서 요한은 왜 하필이면 “목마르다!”는 가련한 비명을 전하고 있을까요? 이것도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요한복음만이 전하는 얘기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목말라 물을 구하던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십자가에서 까지도 역시 목말라 고통하던 제한된 인간, 정말 육체를 가진 인간이셨습니다. 


마가복음에도 예수님의 인간적인 감정을 묘사한 소박한 기록들이 많이 나옵니다. 병든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 비정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때로는 탄식 하고, 또는 인간들의 불신앙에 대해 이상히 여기기도 하고 그를 잘 이해하며 따르는 자는 사랑스럽게도 여기는 너무나 인간적인 면에 대한 묘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그런 표현들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래도 초월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 거리낌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화한 요한이 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피곤하고 목 마르고 인정에 너무 약해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던 분, 요한은 바로 이 육체를 가진 너무도 인간적인 예수님안에서 초월자를 본 것입니다.


그것을 떠나서 존재하는 초월자는 설령 있다고 해도 인간과는 상관없는 초월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 성서 속의 하나님의 뚜렷한 특징은 인간과 함께 하는 하나님, 인간 역사 속에 현존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라는 인간으로 성육신하기 이전의 구약의 하나님도 슬퍼하고 사랑하고 진노하고 후회하는 변화무쌍한 신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신의 모습은 동양적인 신관에서 보면 극히 저속한 것입니다. 하늘이란 자고로 초연해야 합니다. 인간의 슬픔이나 기쁨, 패배나 승리 따위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이미 신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끝끝내 신비에 쌓여 있는 것이 동양의 신입니다. 인간이 도통한다는 것도 바로 그런 신과 같은 초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구약의 하나님은 여간 범속한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구약은 하나님의 그 범속성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의 그 범속성이 바로 인간과 더불어 산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에 대해 분노하고, 전쟁에 개입하고, 의로운자 편에서 위로하고 수난자의 소리를 묵과하지 않습니다. 그가 변덕이 많은 신으로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인간과 더불어 인간의 삶 속에 참여하고 있다는 산 증거인 것입니다. 마치 어린 자식에 대한 엄마의 마음에 비교 된다고나 할까요. 품어 주고, 울면 달래고 끝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버려두거나 때려 주고, 그러다가도 다시 끌어안는 엄마! 그것은 바로 어린 자식을 중심으로 해서 사는 엄마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엄마가 변덕스럽다면 그 변덕은 어린 자식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오는 변덕입니다. 또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만을 택하고 그들에게만 관심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보편성의 원리에선 신관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더불어의 구체성이 뚜렷한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고백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 결코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각자의 운명 속에 지극히 구체적으로 개입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요한은 이러한 하나님이 아예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영광이란 인간 예수님에게서 보는 신의 영광을 말합니다. 이것은 확실히 파라독스한 주장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엄연한 사실이기에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한 그가 또한 그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습니다”고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네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며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생수를 줄 수 있는 이는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지금 물을 구걸하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눈은 아직도 당시의 통속적인 종교관념에 의해 어두워져 있습니다. 초월자는 자고로 초월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연히 구름을 타고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거창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니 이 여인의 눈에는 지금 한갓 목말라하는 초라한 나그네, 비록 물을 주고 싶어도 역사적으로 원수 된 지방의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서는 안 된다는 현실밖에는 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화는 계속됩니다. 이제 그 낯선 나그네는 네가 한번만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는데 그래도 여인에게는 그 말을 하는 나그네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그네는 그 여인의 최후의 방어선을 뚫고 쳐들어갑니다. 갑자기 “네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여인의 숨긴 비밀의 베일을 찢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여인은 딛고선 땅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과 함께 조금씩 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평범한 나그네에게서 그 이상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화제를 물에서 종교적인 문제로 옮깁니다. 즉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들의 성전 중 어느 곳이 참된 예배장소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간의 종교적 논쟁의 테마입니다. 진부하고 낡은 화젭니다. 따라서 그 질문은 지금 여기에 놓인 문제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나그네는 다시 그의 도피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아니, 예루살렘이니, 이 산이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때다.’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때,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합니다. 여인은 다시 지금에서 그의 눈을 장차로 돌립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줄 압니다. 그 분이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까지도 도피하려고만 하는 인간상을 잘 묘사한 것입니다. 나그네는 이제 보다 노골적으로 자기를 드러낸다. “너와 지금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이다!”


딴 곳, 다른 때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네게 물을 좀 달라는 이, 너와 지금 마주선 사람! 거기에 바로 초월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향해 내민 손을 외면하고 초월자를 만날 길은 없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일관된 논리입니다. 이것은 제사의식종교나 일체의 관념적인 종교사상에 대한 무효선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내민 손을 외면하고 이 교회냐 저 교회냐, 이 산이냐 저 산이냐를 따지는 것은 초월자를 찾는 게 아니라 실은 그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입니다. 이 교리가 옳으냐, 저 교리가 이단이냐에 열을 올리는 것도 다 초월자로부터의 도피입니다.


그렇다고 있는 것은 보이는 이웃뿐이라거나 사랑하는 현실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고,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웃을 영접하지 않고 초월자를 영접 할 수는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초월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본질이란 바로 이렇게 유한 속에서 무한을,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월자를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웃과 마주 서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되면 그 순간 이웃은 곧 없어지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내 편의 신이!”


이 시인은 그저 억지로 허무주의자를 자처했을 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와 마주 선 이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소경이 된 것에 불과합니다.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때와 장소는 지금 여기입니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