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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비폭력
   마26:47-56


  오늘 본문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변절한 한 제자가 입을 맞추면서 그 스승을 체포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이에 무장한 하수인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마치 강도를 체포하듯이 예수님님을 결박했습니다. 이 돌발적인 사건 앞에서 제자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황이 워낙 다급해서 그들을 설득하거나 양심에 호소할 여지도 없었고 타협을 꾀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이제 이 순간을 넘기면 모든 일이 끝나고 맙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마지막 수단으로 칼을 뽑아들고 예수님님을 결박하는 하수인들에게 달려들어그중 한 사람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그야말로 이것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자의 실존적인 저항이고, 죄 없는 스승을 지키려는 제자의 충정임이 틀림없습니다. 누구도 감히 이런 태도를 나쁘다고 말하지는 못하리라.
 그럼에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베드로의 이런 행위나 이를 금지시킨 예수님의 태도는 결코 우연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에 나타나는 사건의 연장이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시면서 이제 곧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잡혀 많은 고난을 받고 결국은 죽임을 당하리라고 예고하는데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베드로가 펄쩍 뛰며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고 만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차없이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의 장애물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따라서 그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던 베드로는 지금 실제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자 마침내 칼을 뽑아 한 하수인의 귀를 깎아버린 것이고 그때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시던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베드로를 향해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억울하고 불법하게 체포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끝끝내 그의 평소 소신과 상반되는 방법으로써 자신의 방위를 꾀하려 하지 않았다. 즉 힘에는 힘으로 ,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거룩한 투쟁, 혹은 진리의 수호자처럼 빼든 제자의 칼마저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정당 방위의 논리를 떠나서,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주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까지 돌려 대라는, 그리고 마침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던 평소의 그 분의 뜻을 죽는 순간까지도 철저하게 관철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예수님이 만약 그 마지막 순간에 자기를 수호하기 위해서 칼을 썼거나 베드로가 빼든 칼을 용납했다면, 그래서 억울한 박해와 고난에 처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예수님의 전통에 따라서 폭력으로 저항하고 투쟁했다면 아마 그리스도교는 벌써 이 세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거나 완전히 변질되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역사는 그 만큼 더 참혹한 피 흘림으로 점철되어 왔을 것입니다.

 세계는 지난 60년대 이후, 소위 반항․저항 마침내는 가공할 폭력을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더구나 최근의 우리 나라 사정을 보면 정말 우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무자비한 공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이젠 아예 목숨을 내 놓고 폭력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교회 안에서 마저 이제는 폭력도 불사한다는 주장이 높아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폭력이 언제나 정의와 진리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에 호소해 보아도 개선이 잘 안되니까 양심이나 사랑 혹은 신앙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사실상 포기하고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행동원칙이 보편적인 상식으로 통할만큼 그리스도의 근본정신을 평가 절하해 버린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칼을 칼집에서 뽑아 들었으면서도 전혀 둔감해져서 그것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오늘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명령합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왜 칼을 뽑으며 왜 칼을 뽑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내 길은 막혔다’ ‘더 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혹은 ‘일이 이젠 다급해졌다’ ‘내 호의나 선의는 완전히 짓밟혔다’ 혹은 ‘상대가 저렇게 나오는 데야 난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확실히 이런 것들은 그 나름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해 자기는 수난을 당하거나 희생하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지금 상대방이 빼든 칼에 자기의 생명을 내 대며 하신 말씀이라는데, 최소한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것은 너는 수난을,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보며 십자가를 노래하면서도 언제나 희생이나 수난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것은 결국 ‘당신이나 수고하시오. 나는 그 덕분에 영광이나 누리겠소’ 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 그 수난의 길을 가지 말라고 펄쩍 뛰며 말렸던 베드로의 태도에도  예수님님에 대한 사랑보다도 실은 자기는 그런 길에 따라 나설 수 없다는 일종의 이기성이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그 점을 간파했기 때문에 예수님님은 이어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하려고 하면 오해나 모함 따위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난이란 거의 불가피한 것입니다. 더구나 칼의 힘을 믿는 이 시대에서 사랑과 겸손과 복음을 내세우는 비폭력의 삶이란 그야말로 명백한 수난의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길을 피하기 위해 이 길을 뚫기 위해 칼을 뽑게 되면 결국 그 순간 칼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폭력논리에 스스로 굴복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모함과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선량한 자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는 상식의 세계 속에서 그래도 거기에 말려들지 않고 거기에 나를 헐값으로 팔아 넘기지 않으려면 적어도 나는 그들이 쓰는 방법을 승인하거나 구사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주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경고는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합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선의가 남을 대하다가도 그 선의가 악의의 보응을 받게 되면 그 순간 나의 선의는 급선회하며 다시 칼을 뽑는 악의로 둔갑해 버린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살벌한 칼과 칼의 대결뿐입니다. 이게 바로 역사의 악순환입니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악을 행하려고는 않겠지만 선의가 악의에 의해 조롱 받게 되거나 경멸을 당하게 되면 여지없이 자기의 선의를 거두어들이고 오히려 상대보다도 더욱 강력한 악의를 내세워서 대항하게 되는 게 인간심사다. 그러면서 그런 자기의 행위를 이른 바 정당방위라는 논리로써 정당화시킨다. 그런데 누가복음서의 이 부분을 보면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향해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님의 말씀이 덧붙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당방위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귀담아 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님이 이렇게 비폭력을 가르치고 생명을 내 대며 모범을 보이고 있으나 이것은 결코 막연한 무저항이나 맹목적인 무위를 교훈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기 직전에 예수님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제 검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따라서 칼을 칼집에 꽂으라는 것은 칼을 버리라거나 칼을 아예 갖지 말라는 말씀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그 말씀은 결코 ‘그저 양보만 해라’ ‘하자는 대로해라’ ‘타협해라’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하는 식의 뜻이 아닙니다. 칼 자체가 나쁘다는 정의는 아닙니다.
 그런데 원래 칼이란 칼집에 들어 있을 때 비로소 신념이요 위엄이요 정의 혹은 단결의 상징이 되지 일단 칼집에서 뽑혀 버리면 피 흘림과 음모와 살인의 도구가 되어 버린다. 실은 상대방의 모욕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흐트러뜨리지 아니하고 칼을 가지고도 종내 그 칼을 뽑지 않는 것은 정말 강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반면에 툭하면 칼을 뽑는 사람은 칼에서 최후의 보장을 찾는 비겁쟁이입니다. 우리말에도 칼을 뽑으면 호박이라도 찔러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칼은 일단 한 번 뽑으면 제 힘으로는 곱게 다시 칼집에 꽂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칼의 비극입니다. 까닭은 그 칼에 희생된 사람들의 칼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칼을 뽑아 피를 묻힌 사람들은 언제나 그 칼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너무도 쉽게 칼을 뽑는 습성에 젖어 있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어쩌다 감정이 격하게 되면 주저없이 불순한 방법을 동원하고, 그결과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면 미안한 마음으로 숙연해 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호전성이 더욱 기고만장해지는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칼을 뽑아 휘두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피 묻은 칼을 칼집에 도로 꽂지 못하고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불안의 대부분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계속적으로 악순환에 말려드는 것도 바로 내가 칼을 뽑아 휘둘렀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오늘,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명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 우리가 무슨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기에 앞서 적어도 이 말씀이 억울하고 원통하고 한 많은 죽음 앞에서 자기의 생명을 내대며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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