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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의 투쟁
마4:1-11

  오늘은 40일간의 고난기간, 즉 사순절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맞는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언급했지만 교회가 이렇게 부활절을 앞두고 특별히 40일간을 고난기간으로 제정한 것은 예수님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며 고행하신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공생애를 앞둔 예수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곧 광야로 나가 악마로부터 유혹을 당하셨다는 얘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공통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마태복음의 내용이 가장 구체적입니다.
  이 본문을 대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님이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 의아스러움을 금치 못합니다. 어떻게 감히 예수님 같은 분이 유혹을 당하실 수 있을까? 유혹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나약하여 흔들렸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공자는 40에 불혹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시 예수님은 아직도 수양이 부족해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말인가?
  어쨌든 복음서 기자들은 불혹의 예수님님, 즉 완성된 성자로서의 예수님은 끝까지 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앞둔 그의 생애 마지막에도 유혹을 받아 흔들리는 예수님, 고뇌에 차 몸부림하시는 예수님을 전할 뿐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며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전합니다. 따라서 성서에서는 마치 바람 앞에 바위처럼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소위 도통한 인간상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삶이란 죽는 순간까지 투쟁이라고 만하며 앞에 놓인 과제가 크면 클수록 유혹도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제 본문을 살피면서 예수님이 당한 유혹의 내용을 함께 이해해 보기로 합니다.
  누구나 처음 교회에 출석하여 일정기간이 지나면 세례를 받게 되는데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불신자로서의 삶은 물로 씻듯 깨끗이 정리하고 이제부터는 한 사람의 신자로서 살아가겠다는 일종의 결단의 예식입니다.
  예수님님이 30년간의 사생활을 종지부찍고 요단강까지 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셨다는 것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본격적으로 공적인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의식으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로서, 그리스도로서의 공적 삶이란 결코 수월한 게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그는 큰 유혹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복음서 기자는 우선 예수님이 광야에 끌려 가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가 홀로였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거기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를 응원해 줄 사람도 없었으며, 위로나 조언을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단시능로 유혹앞에 서신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 그가 40일을 굶주렸다고 했는데 그것은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최한계 선상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사흘 굶고 남의 담 넘지 않을 자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이쯤되면 수단이나 방법을 가릴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표시로서 충분한 것 같습니다.
  자, 이렇게 사십주야를 굶주린 채 고뇌하신 예수님께 제일 먼저 닥친 시련은 당연하게도 빵에 대한 유혹이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니므이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굶주린 자의 눈에는 광야에 널려있는 모든 돌들이 다 떡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돌이다! 아니 떡이다. 그래도 역시 돌이다. 그럼 저 돌을 떡이 되게 해야한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는가 만일 저 돌이 떡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거나, 있다면 적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이렇게 되면 굶주렸다는 사실이 곧 신을 걸고 넘어지게 되며 마침내는 ‘떡’ 그것이 전부가 되고맙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러한 유혹에 빠져 자기의 신적인 능력으로서 돌을 떡이 되게 했다면, 그래서 육체의 고통을 면했다면 그 순간 그는 참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포기하고 신마저도 떡을 위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고 외치심으로써 이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그가 당한 첫 시험의 성격을 분명히 밝혀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떡으로만’이라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그가 당한 유혹이었으며, 또 그렇게 한 것은 사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절박한 기아선상에 있었음에도 그렇게 떡이 절대일 수 없다고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화된 우상, 즉’떡으로만‘을 타파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배고프다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의 후예들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40일을 굶어 광야에 널려있는 모든 돌덩이가 떡덩이로 보이는 판에도 에수가 자기의 신적능력을 발동하여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유혹을 끝까지 거부하셨다는 사실은 떡 때문에 그렇게도 허무하게 자기를 팔아 버리는 에서의 후예들에 대한 고발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떡 앞에 얼마나 나약한 것이 인간인가. 40일은커녕 사흘만 굶어도, 아니 제 먹을 떡을 쌓아 두고도 돌로 떡을 만드려고 덤비는게 우리들의 탐욕이 아닙니까. 그러나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떡이 절대가 되어서는 안되며, 돌로 떡을 만드려는 억지나 부당한 수단으로 떡을 구해서도 안될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런 유혹에서 이기는 길은 예수님님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울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유혹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임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회의입니다. 이같은 유혹도 흔히 시련에 봉착했을 때 오는 내적 위기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던 일, 신념을 가지고 나가던 일이 가로 막히고, 실패를 거듭하게 될 때, 혹은 앞에 큰 과제를 놓고 고민할 때 마침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가?” 결국 이런 회의들은 쉽게 뭔가 실증을 요구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 오라라가 아래로 뛰어 내려 봐서라도 자기의 하나님 아들됨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증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애정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신인관계에 있어서나 양자 사이에 사랑의 실증을 찾으려는 사이라면 이미 그것은 깨어진 관계입니다. 예수님님의 경우도 설령 높은데서 떨어진다 해도 털끝 나나 상하지 않는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그것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끝장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한마디로써 그 유혹마저도 거부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라는 엄청난 과제를 앞에 놓고 고놔하는 가운데 이렇게 자기 자신의 정체와 하나님과의 관게를 거듭 확인해 보고자 하는 유혹에 부딪치셧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로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증을 구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그것에 대한 회의가 전제되어 있다는 얘기고 또 그런 회의들은 결코 어떤 실증을 통해서 촐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악마의 최후의 유혹은 그를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산으로 끌고 가서 “내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저 모든 부귀영화가 일시에 모두 그의 것이 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극히 간단한 조건 하나가 전제될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보지않는 이 자리에서 내게 절 한 번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사라지고 찬란한 부귀와 영화의 현실이 됩니다. 이런 달콤한 유혹에 직면한 당시 예수님님께는 “몰라서 그렇지 불의와 타협하고 악한 의지에 굴복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어디 이세상에 한두 사람인가”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더욱 절실하지만 실제로 인간들이 누리는 대개의 영화는 어떤 의미로서든 악마에게 절한 덕분에 얻어낸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님은 그런 유혹에 대해서도 일말의 논쟁의 여지고 없다는 듯 “사탄아 물러가라”고 추상같은 호령을 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라는 유혹임과 동시에 자신도 매도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님께는 “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만을 섬기는 것”외에 다른 것에 절할 수 있는 여지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첫 유혹에서 ‘떡으로만’을 거부한 대신 여기에서는 하나님만을 예배와 섬김의 대상으로 내세웁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만’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의 그 어떤 영화로도 대치할 수 없는 절대입니다.
  우리가 곧잘 상대적인 것을 절대시하고 부귀영화를 위해 악과 타협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만’이라고 하는 참된 절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외에 우리는 결코 그 무엇에게도 절할 수 없습니다. 부귀영화를 사기 위해 악한 것에 고개 숙이는 것은 결국 자기를 무참하게 팔아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우리는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오직 한 분에게만 예배하고 그만 설길 것이다”고 외치던 결연한 예수님의 투쟁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예수님의 세 가지 유혹을 우리는 굳이 그 개인의 내적 투쟁이었던 것만으로 제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전 인류의 유혹의 역사를 대신하신 것이며, 최소한도 이스라엘 민족이 거듭 당했던 유혹을 그 몸에 걸머진 싸움이었다고 보아 좋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됩2니다. 그런데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제일 먼저 겪은 시련이 바로 떡 문제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깃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이 온 회중을 주려 죽게 한다”며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었습니다.
  그 다음의 유혹은 기갈 때문이었는데 출애굽기 22장을 보면 돌을 들어 모세를 위협하며 도대체 하나님이 계신다면 바위를 쳐서라도 물을 내게 하라고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32장에 가서는 마침내 하나님을 배반하고 금송아지르 f만들어 거기에 절하는 추태를 보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이끌고 나온 탈출 세대는 결국 그런 유혹에 굴복함으로써 모두가 새 세계를 못본 채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반해 마티는 그 모든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예수님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한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님의 승리를 단순히 대조시키자는데만 그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와 똑같은 위기를 언제나 당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유혹들을 이길 수 있는 하나의 뚜렷한 좌표를 제시하자는게 바로 마태복음서 기자의 근본적인 의도였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