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최후와 그리스도인의 분수
        눅 23 : 32-38


  오늘이 벌써 3월 1일입니다. 3월은  3․1운동이 있어서 우리 민족사로 봐서도 의미가 깊은 달이고, 교회력으로도 사순절 기간에 해당되기 때문에 매우 경건한 달입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원래 오늘부터 참회절(Fastnacht)까지 사흘간의 카니발 축제이고 재의 수요일(Ashemittwoch)부터 40일간은 예수님님의 고난을 기리면서 숙연한 생활을 하도록 되어있는 사순절인데, 특별히 카톨릭에서는 이 기간에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것을 기념하여 금식도 하고, 고기먹는 일도 삼가면서 되도록 금욕 생활을 하도록 장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에게 있어서는 이 3월이 제일 고통스러운 달이기도 합니다. 우리말로는  사육제라고도 하는 카니발이니 파씽이니 하는 절기는 바로 절제와 금식기간을 앞두고 고기로부터의 이별을 아쉬워 하여 벌이는 축제입니다. 이제40일간의 사순절 기간이 끝나면 고난주간이 이어지고 그 다음은 4월 19일로 부활절을 맞게 됩니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타부시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죽음’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곧 인간이 한계적 존재라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한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한다는 것은 오늘의 낙관주의의 터전을 위협하는 것이며, 삶의 흥을 깨버리는 불쾌한 화제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교회가 실존을 해석하는 매개로서 혹은 방자한 인간들을 조종하는 무기로서 이 죽음이라는 문제를 자주 휘둘러 왔는데 요즘은 그런 테마가 자주 나오면 교회의 출석율이 저하되기 때문에 도로 칼집에 꽂아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은 가능하면 수난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주제로 설교할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놈이 궁상맞게 수난이니 죽음이니 하는 얘길 한다는게 다소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교회가 십자가를 내걸고 있는 이상 결코 그런 주제를 피할 수는 없고 또 피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서 사사기에 보면 어느 민족 설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거인의 얘기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잘 알고 있는 삼손입니다. 그의 생애는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블레셋이라고 하면 주전 12세기 경만해도 지중해 연안을 점령하고 한동안 상당한 문화를 꽃피웠던 민족이었는데 당시에는 이스라엘도 그들의 지배아래 있었으므로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처지에서 이스라엘의 한 부부가 아들을을 얻자 그를 ‘나실’로 결정합니다. ‘나실’이란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나실인은 몇가지 꼭 준수해야할 사항이 있는데 (1) 절대 알콜을 입에 대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2) 시체를 만져서도 안되며 (3) 머리를 깎아서도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금욕생활, 성결한 생활,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힘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 등을 뜻한 것입니다.
  아무튼 삼손이 이런 나실인이 된 것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나실인으로서의 규례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목적에 있어서도 갈팡질팡합닌다. 적국인 블레셋의 여인에게 현혹되어 그를 아내로 맞아들이는가 하면, 창녀의 집에 드나들기도 하고, 함부로 힘을 과시하여 사자를 찢어 죽이기도 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재산을 약탈하기도 했고, 작은 일에 격분해서 여우 3백마리를 붙잡아 그 꼬리들을 서로 묶고 태워버리는 등 난폭하기 그지없는 짓들을 일삼았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에게 단 하나 보존된 것이 있었다면 힘의 원천인 머리를 깎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창녀 들릴라의 거듭된 유혹에 넘어가 결국은 머리털마져도 깎이고 완전히 무력해져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결박되어 두 눈을 뽑힌 해 감옥 속에서 연자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모여 축제를 벌였는데 그때 그를 희롱하기 위해 3천명 이상이나 모인 그 신전에 삼손을 끌어 냈습니다. 마침내 삼손은 하나님께 엄숙한 최후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하나님이여,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의 두 눈을 뽑은 저 원수들에게 단번에 복수하게 하소서.” 그리고는 전신의 힘을 모아 그가 무꾹인 신전 중앙 기둥을 부러뜨려서 거기 모인 모든 적들을 몰살시키고 자신도 장엄한 최후를 마칩니다. 허랑방탕하던 생애를 마지막 순간에 재정리하여 그 힘과 뜻을 한데 모아 죽음으로 거사했다는 이 삼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배울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결국 원수를 갚는데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것 가운데 희랍신화에 나오는 거인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배반하고 신만이 독점한 불을 훔쳐서 인간들에게 줌으로써 인간 편에 섭니다. 그러나 결국 제우스의 진노를 사서 코카서스 바위에 통철로 결박당한 채 계속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아우에게 최후의 부탁을 합니다. 그것은 굳게 잠가놓은 상자 하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열지 말고 잘 보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우는 제우스가 보낸 여인 판도라의 꾀임에 넘어가 그만 그 상자를 열고 맙니다. 그 순간 그 안에서 온갖 질병과, 증오, 도둑질등 인간세계를멸할 갖은 악한 것이 다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것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을 위해 가두어 두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아우는 그만 겁에 질려 다시 그 뚜껑을 급히 닫았는데 그때 그 상자 안에서 “나도 내보내 주시오”라는 가날픈 비명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너는 무엇이냐?”고 묻자 “나는 희망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의 최후적 배려였습니다. 세상에 병과 증오와 같은 악이 범람하여 인간들이 고뇌 속에 처하게 될 때 ‘희망’을 보내어 인간들을 구출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프로메테우스는 삼손보다 높은 차원에 섰습니다. 삼손의 최후의 소원은 복수인데 비해 프로메테우스의 최후의 소원은 역시 처음과 같이 인간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배신한 것처럼 그의 아우는 다시 프로메테우스를 배신했으며 그것은 제우스와 인간세계 사이의 불화를 오히려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에 반해 누가가 서술한 예수님의 최후 이야기는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삼손이나 프로메테우스와 같이 꼼짝할 수 없는 막다를 골목에 다달았습니다. 삼손이 신전기둥에 비끌어 매인채 죽음 앞에 섰듯이,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 바위에 결박되어 죽음을 기다렸듯이 예수님 역시도 십자가 형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가 피곤과 절망과 아픔 속에서 마지막으로 정신을 가다듬어드린 기도는 “아버지여,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복수를 위해 최후의 기도를 드렸던 삼손의 그것과는 다르며, 인간을 위해 신을 배신한 프로메테우스의 그것과도 다릅니다.
  예수님의 이 피묻은 마지막 절규는 복수나 배신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의 철저화이며, 한 쪽을 위해 다른 한 쪽을 배신하거나 이 쪽의 것을 빼앗아 저 쪽으로 넘겨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쪽과 저 쪽의 불화사이에 자신을 화해의 제물로 바치고자한 기도였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에도 복수 행위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높이 사는 전통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서원하고 나서는 아들이나 어떤 집단에 대한 복수를 위해 생명을 내대는 행위를 아무런 비판도 없이 감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복수심은 사리판단을 흐리게하고 행동으로 노출되면 싸움, 살인이 되며 집단화되면 전쟁으로 번집니다. 복수는 반드시 복수를 낳습니다. 또 복수의 악순환은 언제나 증대됩니다. 뺨 한 대를 맞은 사람은 뺨 한 대를 되돌려 주는 것으
로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왕복으로 때려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므로 복수는 결국 비극을 확대시키는 것 외에 다른게 아닙니다.
  이에 비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그를 위하고 싶은 프로메테우스적인 애정이 있습니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이 무조건 높이 평가되어 마침내는 그 방법에 대한 비판의 눈도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병든 부모나 또는 굶고 있는 처자를 위한 강도행위, 살인행위도 동정을 삽니다. 그러나 성서를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칠 수 없듯이, 헌금을 하기 위해 절도를 할 수 없듯이 목적이 숭고하다면 그 방법이나 수단 역시도 온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죽는 순간에 나 아닌 다른 두 사람의 원수된 관계를 풀어주고 그들의 화해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자 하는 hclgn가 있습니다. 가령 원수된 아버지와 아들, 갈라진 아들과 며느리 또는 원수된 아들과 그 친구간의 화해를 위해 두 손을 함께 꼭잡고 숨을 거두는 어떤 어머니의 최후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다른 하나를 죽이자는 행위가 아니라 둘 다 더불어 살게하기 위한 소원입니다. 누가가 묘사한 예수님의 최후는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원수된 하나님과 인간을 서로 화해시키고자 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최후의 절규였습니다.

  저는 원래 3․1운동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역할을 그리 적극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었는데, 요즘 와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3․1운동 때 일제의 총칼 앞에서 무참하게 죽어간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정말 우리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화해의 제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3․1운동은 침략국인 일본에 대한 복수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못가진 자에게 넘겨 주고자한 공산혁명 같은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무저항, 비폭력을 행동강령으로 내세운 것이나 33인의 민족대표들이 잡혀가면 당장 내란 죄로 사형을당할 줄 알았으면서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고스란히 앉아서 경찰을 기다리다 체포되어 갔다는 것은 복수나 배신 따위의 차원이 아니라 원수된 두 나라 사이에 자시들을 화해의 제물로 바치겠다는 각오가 뚜렷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3․1운동 당시 교회의 희생은 실로 엄청나게 컸습니다. 수원 제암리 교회 방화사건만 하더라도 그 마을 사람 전체가 만세운동에 가담했는데 교인들만 교회당에 모이게 하고 문을 잠근후 불을 질렀습니다. 30명의 교인이 그대로 불에 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슬픈 역사를 지닌 민족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악순환의 백척간두에 서 있습니다. 집권자와 국민들이 다 이 때를 난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안도 제시되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오늘 예수님의 최후는 무엇보다도 화해를 위한 죽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는 그의 최후의 기도는 양극단 사이에 바쳐진 화해의 향불이었습니다. 그가 제자들을 향해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도 바로 자기처럼 수난을 당하면서라도 화해의 제물이 되라는 당부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난국을 타개하는 길은, 그럼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 수 있는 길은 바로 이같은 화해의 제물이 중가네 설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제 분수입니다. 때리는 자와 맞는 자 가운데 나서서 남이 맞을 매를 제몸으로 가로막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의 화해의 죽음은 부활사건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미래의 개막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에 희망을 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과감히 제물이 되고자 할 때 화해의 역사와 부활의 새로운 현실이 우리 민족사에도 도래할 수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