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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현실성
고전 15:12-19


  그리스도교가 부활절을 봄으로 제정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입니다. 겨울이 죽음의 상징이라면 봄은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자연계의 생명을 온통 지하에 가두는 무덤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봄은 땅에 갇힌 생명들을 다시 불러 일으켜 마치 굳게 닫힌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새롭게 소생하게 합니다.
  서구 사람들은 달걀으로도 부활절을 상징합니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 생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아날로기를 본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부활절을 편지쓰는 계절로도 삼습니다. 비록 일년 내내 소식이 없던 친지, 친구지간일지라도 이 때 만큼은 서로 글을 주고 받으면서 그 시든 정을 부활시키자는 것입니다.
  실은 어떤 종교이든 성탄절은 다 있으나 수난절과 함께 부활절을 가진 종교는 오로지 그리스도교가 유일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잘 알다시피 원래 그리스도교는 참 보잘 것 없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 때의 사회적인 비중에서 볼 때는 하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의 생애를 그저 단순하게만 보면 그 출발부터가 제법 우주적인 듯하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온 유대사회의 관심의 초점이 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실상 그것은 예수님 부활 이후에 나온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적 입장이 채색된 것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의 활동무대도 유대 사회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정통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쌍놈들이 유하던 저 변두리 촌락 갈릴리였고, 그의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 역시도 온갖 환자들로부터 창녀, 세리들에 이르기가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종당에는 그가 로마 권력에 의해 체포되어 식민지 정치범에게 가하는 가장 무자비한 형인 십자가에 달려 사형되었으나 왜 그런 처형을 받아야 했는지 그 조명조차도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그를 따르는 동안에는 별 이렇다할 특성을 보이지 않았던 위인들이었습니다. 남다른 투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뛰어난 지혜가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막판에 가서 그들의 스승마저도 버리고 모두 줄행랑을 쳤다는 것은 그들 본래의 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한심하던 자들이 어떻게 후에 와서는 그토록의 무서운 투지로써 유대사회에 정말 물의를 일으키고 이단으로 몰려 박해를 받고, 마침내는 유의 경계를 넘어 가는 곳마다 복음의 불길을 일으키면서 결국은 로마의 심장에까지 돌진하여 이번에는 도리어 그들을 복음으로 굴복시킬 수가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경악할 사실은 바울같은 사람이 그들의 신앙에 승복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회학적인 고찰이나 심리학적인 분석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그는 이미 전향하기 이전부터 당대의 탁월한 지성인이면서도 또한 백절불굴의 유대교 투사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그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적은 무리의 신앙에 굴복하여 그 때까지 쌓아온 자기의 모든 이력을 그의 표현대로 하면 오줌이나 똥처럼 내버리는 극단한 자기 변혁이 가능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미리 결론을 내린다면 제자들이나 바울의 그런 획기적인 변화는 모두가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의 회심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9장과 22장, 그리고 26장에 각각 소개되고 있는데 그 세 곳의 내용이 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대개가 9장의 기록을 원형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바울이 다마스커스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러한 극적인 사건이 그를 굴복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경험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낫던 다른 사도들의 체험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누가가 기록한 그 사도행전에는 당시 그가 또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어떤 강력한 광채를 보고 눈이 어두워졌다고도 하는데 정작 바울 자신은 그런 외형적인 현상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그로인해 야기된 자기 삶의 혁명만을 문제시하여 이제 자기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자처하면서 “보라!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 외칩니다. 즉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제의 본문으로 택한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를테면 바울이 자기의 부활신앙을 밝힌 간증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기 때문에 인간도 반드시 부활한다”는 논조로 전개되는 그의 부활신념은 너무나도 엄청나서 나같은 사람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하지만 어쨋거나 그는 우선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예 일말의 논란의 여지도 없다는 듯 자명한 사실로 딱 전제하는 그 탄탄한 기반 위에 서서 다시금 미래에 있을 인간부활의 확실성을 역설합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 만약 그것이 없다면 모든 것이 말짱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제 아무리 웅장한 사업을 전개하고, 그 어떤 장엄한 신학을 논한다해도, 아무리 거대한 교회와 치밀한 조직과 성스러운 예배의식을 갖추었다고 해도 부활신앙이 변변치 못하면 한갓 공허한 짓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으려면 부활신앙이 제대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32절에 가서는 그런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의 삶이란 결국 “내일이면 죽으리라! 오늘 먹고 마시자”라는 향락주의, 허무주의에로 귀착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나날이 팽배해가는 현대 향락주의, 허무주의 앞에서 오늘 우리가 외쳐야할 최후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깨닫게하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임무와 권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진 이 부활의 메시지를 널리 선포하는 일입니다. 부활신앙의 현실성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실제 구현해가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교회는 바로 이 부활사건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기원은 성탄절이 아니라 부활절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이라 했고, 괴테는 죽음같은 실의에 빠졌던 제자들이 그 절망의 무덤으로부터 소생하여 울며불며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다닌 그 역동적인 사건 속에서 바로 부활신앙의 현실성을 읽었습니다. 한마디로 부활은 무덤 속에서도 체념, 절망할 수 없다는 생의 모진 절규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황당한 얘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서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아브라함이 자기의 심장같은 외아들의 목을 정말 따겠다고 칼을 뽑아 들었던 것은 환장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능히 죽은자도 다시 살리실 수 잇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까닭,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배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백세에 기적같이 얻은 외아들을 제 손으로 잡아 바치면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끝끝내 하나님은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신다는 부활신앙에 목을 내댄 결과 마침내는 이삭의 부활, 아니 자기자신의 부활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난다는 예고도 몇차례 반복했습니다. 그것 역시 예수님의 부활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거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고뇌하면서도 결국 그 죽음의 쓴 잔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고, 무덤에 까지도 들어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실상 그런 부활의 신념을 가진 자 앞에서는 죽음도, 무덤도, 외아들의 목을 따야하는 환장할 상황도 무색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같은 부활신앙의 계보에 서 잇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실로 위대한 사실이며, 우리가 그같은 믿음의 유산을 가졌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축복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부활신앙을 운운하는 우리들의 삶에 체념과 절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봅니다. 체념이나 절망은 그 자체가 이미 신앙의 무덤입니다.
  사도행전 3장 전반부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가 그의 그 비극적인 숙명으로부터 탈출되는 극적인 사건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날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성전으로 들어가려는데 한 앉은뱅이가 성전문 어귀에 앉아 구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거지는 예외없이 돈 한 푼을 기대하여 그들 앞에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쓰다남은 동전이나 몇닢 뿌리고 가면 그만인데 왠지 오늘따라 말이 많습니다. ‘우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한 두푼 적선하는 손을 볼게 아니라 지금 당신 앞에 마주 선 사람으로서의 ‘우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지는 사람으로서의 그들에게는 흥미가 없어서 여전히 무엇을 얻으려고만 그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앉은뱅이 거지의 그러한 태도는 충분한 이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글 한 인격으로 보아주는 사람을 대한 지가 너무 오래여서 이젠 아예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 조차도 잊고 살아가는 처지였기 때문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한 두푼 적선만 눈에 띄겠끔 체질화된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앉은뱅이 거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를 향해 ‘우리’를 보라고 한 베드로와 요한은 또 어떤 자들이었을까요.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도 한 때는 이 앉은뱅이 거지의 운명처럼 절망과 체념 속에서 완전히 좌절하여 주저앉아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앉은뱅이 거지가 그날  그날의 생계를 위해 오가는 사람들의 처분만을 바라며 구걸의 손을 내밀 듯이 그들 역시도 티베리아 호수에 손을 내밀어 그 얻어지는 물고기로서 연명하는 것이 그들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고기낚는 어부에서 일
약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웅대한 꿈을 안고 새 삶의 발돋움을 시도하는가 싶었는데 그것도 잠깐, 어이없게도 잔인한 인간들이 그들의 희망이었던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로마황제의 이름으로 처형하여 무덤에 매장해 버렸던 것입니다. 별수없이 그들은 떠났던 티베리아 호숫가로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했던 그들이 그 허무의 강가에서, 그 재기불능의 좌절 속에서 다시금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날 수 잇었던 것은 바로 유사이래 인류의 최대의 숙적이었던 죽음을 걷어차고 일어난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지금 앉은뱅이를 향해 “우리를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과 금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두푼 적선에 관심해서 찌푸린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거지에게는 여간 가혹한 말이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인간의 그런 낡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고, 보다 근본적인 현실적 구원 문제에 주의를 집중합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손에 부축되어 새로 걷기 시작했던 그들 자신의 부활체험에서 발해진 말이였으므로 대단한 확신에 차 있었을 것이 뻔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그들의 신념 그대로 앉은뱅이는 일어났고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부활신앙의 현실성이 대체 어떤 것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이라는 숙명을 벗고 부활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체념의 무덤을 열고 새롭게 소생했던 것처럼, 앉은뱅이가 자기의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굴레를 깨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 것처럼 현재 우리를 얽매고 있는 온갖 어두움의 세력, 죽음의 굴레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란 먼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로써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 기적에는 언제나 사건으로서의 부활이전에 믿음으로서의 부활이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부활 신앙이 분명할 때 우리 역시도 현실 속에서 부활사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 더 부언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4월 19일로 올 부활절을 맞은 우리 한국민으로서의 감회가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쁨에 앞서 이렇듯 착잡한 심경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419 혁명 정신이 이제껏 압살되어 온 한반도의 역사적 비극 때문일 것입니다.따라서 오늘 우리는 부활의 메시지가 가장 절박한 땅이 바로 좌절과 체념의 무덤처럼 버려진 한반도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절규하여 무덤 속의 마른 뼈들을 소생시키듯 이 불모의 땅에 새로운 부활혁명의 불길이 댕겨야할 주체세력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자각을 다시 한번 뜨겁게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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