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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회복을 위한 투쟁
롬 6:5-6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구원은 구체적으로 약자와 피압박자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공생애에 들어선 예수의 첫 선언은 바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해방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산상설교의 핵심도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미움받고 배척 당하고 욕먹고 누명 쓴 자들에게 축복을 선언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도 주린 자, 목마른 자, 망명자, 헐벗은 자,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고 있는데 거기에서 더욱 주목할 것은 심판주가 좌 우측에 있는 무리들을 향해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그들을 돌보지 않는 것이 곧 나를 돌보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소외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상과 같은 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의 대상, 구원의 대상들이 한결같이 윤리나 종교적 가치와는 상관없는, 단순히 사회계층 적으로 보아 가난하고 억눌린 수난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당시 사회 속에서는 이른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과도 일치되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그의 초대의 대상에도 부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소외 자들의 인간회복이 실로 윤리나 종교적 가치 보다 우선한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서 궁극적 구원이라는 이른바 종교, 윤리적 규범에서마저도 자유하는 현실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좋은 예로서 잔치에 초대하는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잔치를 마련하고 이미 초대장을 보낸 사람들에게 다시 종을 보내어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이들은 하나 같이 거기에 응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종들을 거리로 내보내어 가난한 자, 불구자, 맹인 등을 모조리 불러오게 하여 결국은 그들만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데 그들에게는 역시 일말의 종교나 윤리적인 기준은 적용되지 않고 단순히 가진 자와 대조를 이룰 뿐입니다.

 이런 특징은 탕자의 비유나 잃은 양 비유에서도 똑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현실적 구원이란 종교 또는 윤리적인 척도에서 완성된 인간이 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권력자요 부한 자가 중추로 된 기존사회의 변혁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예수의 선교자로 알려진 세례요한도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다니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이 평평해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지리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 말함으로써 구원의 길이 곧 이 세계의 평등과 직결된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1:51이하의 마리아 찬가도 “주께서 그의 말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의 권력을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고 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다’ 는 것은 권력 체제를, ‘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다’는 경제구조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권력체제, 경제구조의 변혁이 곧 현실적 구원과 직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적 구원이란 사회개혁에 있다는 말인가. 균등한 경제 분배, 균등한 권력 분배가 곧 구원이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사회개혁에 대한 정열이나 프로그램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사회냐 실존이냐를 묻는다면 역시 후자에 가까운 게 사실입니다. 확실히 그에게는 사회구원보다는 인간구원이 우선적인 관심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는 인간을 결코 내적, 정신적, 존재로만 보지 않고 역사 혹은 사회 속의 존재로 조망하셨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현실적 구원 역시 삶의 현장인 사회문제와 유리 될 수 없다고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뚜렷한 사회개혁의 프로그램을 제시한 적은 없지만 대신 개인의 행동방향을 말할 때믄 언제나 기존사회와의 관계성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시고 계십니다.
 가령 죽은 부모를 매장한 다음에 그를 따르겠다는 사람더러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장례하게 하고 너는 나를 다르라”
고 하신 것이라든가, 구원의 길을 묻는 부자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이를테면 기존의 사회질서나 소유가치를 거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극단적인 명령이 아무에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나 사회질서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개인의 구원에 장애물이 될 때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많든 적든 간에 그 소유가 현실안주의 소굴이 될 때 예수는 단호하게 그것을 버리도록 요구했습니다. 실제 예수님으로부터 뭔가를 버리고 탈출할 것을 요구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기존사회속에 안주한 채 미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따위는 사실상 거부하던 계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잔치에 초대하는 비유를 보면 초대받은 자들이 그 초대를 거부하는 이유가 밭을 샀고, 결혼을 했고, 소를 샀기 때문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경제력이 허락하는 만큼 다처제가 보장됐기 때문에 결혼도 실은 돈으로 여자를 산 셈이 됩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소유 때문에 구원의 길을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바로 그런 것으로부터의 탈출을 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당시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 즉 아무런 현실적 보장도 갖지 못했던 자들에게는 도리어 그 사회에로의 복귀를 명했고, 또 그럴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죄인’이란 당시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이르는 말로써 완전히 인권을 박탈당한 계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창녀들이라든가 전과자들, 세리등이 이에 속했고, 나병환자나 정신병자등의 불치병 환자들은 죄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하여 죄인으로 규정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그런 계층에 접근하여 교류를 가짐으로써 유대인들로부터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샀던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소외계층을 아무런 전제도 없이 무조건 포용했다는 사실도 눈여겨 봐야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부자들에게 명한 것과는 자못 상반된 지시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 소개되는 나병환자 치유기사를 보면 예수님이 그를 “불쌍히 여겨”치유했다는 단순한 서술 다음에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데 대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사람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는 지시로 끝납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예수님님이 모세의 법을 인정했다느니 아니라느니 하는 종교적 논쟁의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 발언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병환자의 생존권 내지는 인권에 있습니다. 나병환자야말로 천벌을 받았다는 관념에 의해 제 집, 제 사회에서 쫓겨나 당장 생존권에 절대절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가 살 수 있는 길이란 그 철저한 소외로부터 그의 가정 또는 사회로 복귀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나병이 완쾌되었다는 제사장의 확인증서가 필요했고, 또 그 사실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의식으로서 율법이 정한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같은 예는 마가복음 1:44, 2:11, 5:19, 34, 8:26, 누가복음 7:19 등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그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을 마다하고 굳이 집으로 돌려 보낸 경우마저 여럿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행각이 일단 사회개혁보다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인간회복을 목표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만약 한 실존을 구원하려는데 있어서 기존의 사회질서가 그것을 가로막을 경우는 가차없는 결전도 불사한다는게 바로 예수님의 기본입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안식일법과의 충돌이 그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안식일법은 당시 유대사회의 중추적인 비중을 가진 질서로서 본래는 인간에게 휴식을 주기위해 설정된 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의 귄위로 고식화되어 인간을 완전히 결박할 뿐 아니라 안식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근거가 될 때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폭탄 선언과 함께 정면에서 안식일법을 파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사건 역시 사회개혁 프로그램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제도이든 인권과 충동이 될 때는 인권 옹호를 위해 기존질서와 주저없이 대결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현 사회질서가 인권과 직접적인 충돌이 없는 한 영속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하는 것이 오늘의 실존적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일까요. 바울은 이를 죄에서의 자유라는 식의 포괄적인 언어로 표현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율법에서의 해방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무엇일까요. 물론 그것은 유대교의 율법을 안중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각 조문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은 율법성입니다. 가령 로마서 7:6에서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던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그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고 했을 때 거기서 드러나는 율법성이란 바로 인간을 얽어매는 것, 인간을 ‘속박하는 힘’으로 파악됩니다.
  십자가는 이같은 율법성에서의 해방사건입니다. 따라서 죄라는 것을 지나치게 인간의 내적 측면에서만 보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해방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하면 반드시 세계변혁을 위한 투쟁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의 궁극성 없이는 이웃을 위한 진실한 행위가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웃과의 관계를 외면한 채 하나니께 갈 수 있는 직통로는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