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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브라이즘의 인간상

   히 11:17-19



우리 민족도 기구한 운명을 가졌지만 히브리 민족은 더욱 파란 많은 과거를 살아왔습니다. 그들이 뚫고 나온 그 험난한 수 천년의 역사적 질곡을 생각해 보면 정말 불가사의 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내게는 이스라엘이야말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기적의 민족이라는 말이 하나도 거북하지 않을 정도로 실감되곤 합니다.


구약시대까지 소급하지 않더라도 로마 식민지까지를 합치면 그들은 무려 2천 5백년간이나 나라 없이 배회하던 민족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유랑하기를 수백 대나 계속한 셈입니다. 역사 가운데는 한 때 일어났다가 사라진 종족도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그들 역시도 전설 속에나 나오는 민족쯤으로 이미 오래 전에 망각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렇게 소멸되지 아니하고 2천년이 넘도록 부활의 때를 기다리다 마침내 2차 대전 말에 팔레스틴으로 귀환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세계 각 곳으로부터 속속 그 황무지로 모여들었습니다.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나 막상 귀환한 그들은 이미 모든 게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먼저 엉망이 된 언어부터 손질하고 다듬어서 언어의 통일을 보았고, 사막에 거미줄처럼 파이프를 묻고 갈릴리의 물을 끌어 올려 마침내는 그 불모지를 푸른 옥토로 변모시켰으며, 세계에서 쟁쟁한 지위들을 버리고 몰려온 과학자,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이제는 중동의 유일한 근대화 국가를 이룩했습니다.


하기야 그전에도 이미 그들은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사실상 세계사를 주름잡았습니다. 서구문명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결정이라는 사실 말고도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최대의 혁명을 초래한 칼 맑스로부터 인간학적 혁명을 촉발시킨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드라든가 과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아인쉬타인 등이 모두 그들에게서 나왔으며 현금 세계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도 모두가 이 민족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 경제라든가, 정치계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고, 심지어 마르틴 부버는 그리스도인도 아닌 유대교도인데도 세계 교회들이 그의 말들을 마치 교회의 표어처럼 내걸고 있습니다.


구라파 사람들은 「쥬우」또는 「유대」하면 송충이처럼 싫어합니다. 뱀과는 같이 잘 수 있어도 유대인과는 같이 잘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증오심을 이용해서 히틀러는 무려 6백만이라는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히틀러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구라파 사람들이 합동작전으로 저지른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증오하면서도 또 그 유대인들을 모시고 숭배할 수밖에 없었던 게 바로 구라파 사람들의 아이러니입니다. 이유는 유대민족에서 기원된 그리스도교가 바로 그들의 유일한 종교이며,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 바울이 모두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갖는 의문은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처럼 무서운 민족이 되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라 없이 떠돌아다닌 주제에도 그토록 세계를 압도할 수 있었던 저력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히브리 민족의 종교적 측면과 거기에서 비롯된 그들의 존재양식을 추적해 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것은 곧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뜻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삶의 양식이 곧 그들의 민족사를 꾸몄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동시에 그들의 그러한 민족사가 곧 아브라함의 존재를 만들어 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았고, 아브라함의 삶의 행태를 생활의에 모범으로 삼아 ‘나는 유대인이다’는 자기 동일성을 끝까지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그랬기 때문에 실은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겉돌다가 결국은 타민족의 미움을 사게 된 것입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그들이 사는 곳엔 회당, 시나고게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시나고게를 통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정신과 신념을 배양해 왔습니다. 이방 땅에서 온갖 서러움과 모멸을 당하며 살아가다가도 한 주에 한번씩은 반드시 그 시나고게에 모여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신념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토록 모질고 끈질긴 히브리적 인간상을 다소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먼저 아브라함의 삶의 편모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얘기가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외아들이나 순결한 처녀를 신 앞에 제물로 바친 예는 사실 고대의 동양이나 중동일대에 흔히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여러 민담에도 그런 얘기가 전래되고 있고, 고전에 속하는 심청전도 그 배경에는 역시 같은 사회적 인습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그러한 끔찍한 인습을 그대로 두지 않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서술함으로써 완전히 신앙의 문제로 바꾸어 놓은 다음, 하나님은 귀여운 자식을 죽여서 바치기를 원하시지 않고, 대신 양을 잡아 바치기를 원하신다고 밝힘으로써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살리자는 축복과 사랑의 하나님이지 피에 굶주린 진노와 징벌의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그의 외아들인 이삭을 죽인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아비 됨을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인륜 대계가 무너지는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의 등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업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이삭을 통해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했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 죽이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이삭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를 죽이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죽이는 것이며, 인류의 미래가 끝장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꼼짝하지 못하고 그 같은 숙명적인 강요에 굴복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운명에 저항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외아들을 잡아야 한다는 그 강요가 만약 당시의 인습이라면  그것은 오늘날의 정치적 혹은 법적인 강압보다도 더 무서운 고대사회의 인습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지금 설명이 안되며 이유가 없는 그 인습의 강요에 몰려 제 손으로 제 목을 따려는 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거기에서 그쳤다면 단지 숙명의 노예가 되었을 뿐 결코 히브리민족의 조상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9절은 아브라함이 그 순간 정말 이삭을 잡겠다고 칼을 뽑아 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이삭을 살리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강요받은 의지에 의해 제 자식을 죽이려고 칼을 뽑아 들었을 망정 그래도 하나님은 이 죽음에서 내 자식을 반드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신앙을 끝끝내 거머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그런 절박한 소망이 이루어질 아무런 여지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죽은 생명을 다시 살려 그가 당초에 약속하신 말씀들을 꼭 이루실 것이라는 신앙에 그의 목을 내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시험에 의해 심판 받는다. 순탄할 때는 예수님님의 분신 같던 사람도 시련이 닥치면 쉽게 분노의 화신이 되거나 절망의 화신이 되는 예를 자주 봅니다. 그런 경우 그 시험은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가 되지 못하고 한갓 인간적인 불행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시험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시험 당한 만큼의 상처나 손실이 되는 경우는 모두가 그 시험을 믿음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굴복 당한데서 오는 결과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의 외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환장할 순간에도 결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그런 역설적인 신념이 바로 신앙의 참된 저력입니다. 그런 불굴의 신앙에 감히 체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신앙은 체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내세우는 자세에 체념이 도사리고 있음을 봅니다. 그것이 바로 소위 신앙인이라는 우리들의 몰골입니다.


우리의 생활도 엄밀히 말하면 시련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그 시련의 중요한 특징은 언제나 외아들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0입니다. 즉 시련이란 곧 외아들에게 위협이 닥친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외아들은 무엇일까? 미리 정의를 내리면 이것이 없어지거나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외아들입니다. 건강이라든가 학업 또는 남편이나 자식이나 아내 등이 다 외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화가에게는 눈이, 음악가에게는 귀가 외아들일 테고, 사업가에게는 사업체가 외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툭하면 그런 외아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암담한 현실에 내몰립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신앙적으로 그 시련을 잘 극복하여 오히려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비약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점에서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을 배울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 아들을 잡아 바치면서도 절대로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산다는, 죽은 이도 하나님은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신앙이 마침내는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이삭을 찾게 했습니다. 여기에 제시된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삶의 궁극적인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혈육, 이삭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아브라함은 분명 그의 소중한 외아들을 살리기 위해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에 부딪혔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이 부분에서 실패합니다. 


믿음도 좋고 하나님도 좋지만 백세에 얻은 나의 외아들이 더 소중하다는 태도에서 실은 하나님도 외아들도 다 잃어버리는 게 오늘날의 인간 현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도 끝끝내 하나님은 죽은 아들도 살리신다는 신앙 쪽에 섬으로써 마침내는 하나님도 이삭도 다시 얻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아브라함의 신앙적 계보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실로 위대한 사실이며, 우리가 그 같은 믿음의 유산을 가졌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축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아브라함의 신앙의 극치를 예수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죽음을 예고함과 아울러 다시 살아난다는 얘기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곧 죽을 자기를 그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릴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같이 부활을 예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그러한 믿음 그대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고, 또 다시 살아난 예수님은 이미 죽음 이전의 예수님과는 다른 차원의 예수님이셨습니다.


만약 당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신앙을 저버렸다면 제 명대로 살다 간 예수님은 될 수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부활의 예수님, 오늘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님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체념을 모릅니다. 체념은 신앙의 무덤입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이삭을 잡아 바치면서도 결코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도 부활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자 앞에는 실상 죽음 같은 시련도 무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인구는 412만입니다. 그런데 히틀러에게 죽은 유대인은 무려 600만입니다. 남부 독일의 뮌헨 근교 다카우라는 곳에는 그 악명 높은 유대인 강제 수용소(kz)가 있습니다. 나는 뮌헨대학 유학시절에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우선적으로 그곳을 안내하곤 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약 10여 년 동안 20만 명의 유대인이 그곳을 거쳐갔고, 그중 31,951명이 살해되거나 온갖 인체실험용으로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그들이 부른 노래 하나가 있습니다.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실 때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

나는 믿는다. 영원한 평화의 그날이 이 땅위에 오리라는 것을, 

더딜지라도 그날이 오리라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질기디 질긴 아브라함 자손의 신앙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끝끝내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말해 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구보다도 오늘 우리들에게 그런 불굴의 신앙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아무리 우리가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신앙적 계보에 선 자들이라고 해도 실제 그런 신앙을 계승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도 다음과 같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한에는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만들 것이다”(눅 3:8).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는 외아들보다는 믿음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은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