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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가운데 일부분인 오늘의 본문은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동일성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뚜렷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비록 로마 제국의 점령하에 있긴 했으나 헬레니즘 문명이 절정을 이룬 화려한 대도시였습니다. 특히 당시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헬라 사상은 에피큐리안들의 쾌락주의적 행복론이었는데 그것은 무엇이든지간에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일 때만 참이요 진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일하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부득이 일해야 했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사변의 유희를 위해 우주와 인간을 논했으며, 심지어 종교마저도 쾌락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시에는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오늘나까지도 그 폐허된 신전의 잔해가 상당량 남아 있는데, 어쨌든 그 신전에는 한 때 천 여명의 미녀 사제들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신전에서의 예배 행위라는 것도 엄숙한 제사가 아니라 그 여사제들과 실컷 먹고 마시며 쾌락을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쾌락주의는 인권을 옹호하고 냉정히 시비를 가려야 할 재판정에까지도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 사이에 발생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판을 벌인 경우 먼저 양측을 대변하는 자들이 각각 한 사람씩 선정되고 거기에 중재자 한 사람이 나섭니다. 당시의 재판은 대개 넓은 광장이나 거리에서 실시되었는데 만약 그 같은 소규모의 중재가 실패하게 되면 방청객 중에서 배심원을 선정하게 되는데 20, 40, 100명 때로는 6천명까지도 동원한 예가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으례히 관객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서로 열띤 응원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것은 열광하며 보고 즐기는 일종의 스포츠 경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 이러한 세계 속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것입니다. 초기의 그들은 물론 극소수였으며, 더구나 우상숭배를 절대 반대하고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고린도의 소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경향의 처세술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유대교의 전통대로 세상과의 관계를 아예 끊음으로써 극단한 율법주의, 금욕주의가 되어 세상에 대해 초연 하려는 입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에 어울려 살면서 때로 불의나 쾌락주의와도 타협해 가며 한마디로 적당히 살아가려는 생활방식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양태로 흐르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강경한 경고와 함께 이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위치가 대체 어떤 것인지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5: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음행하는 사람이나, 욕심부리는 사람이나, 약탈하는 사람이나,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들은 아마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먼저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금욕적인 혹은 율법적인 처세로써 자기를 지키려는 자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이런 입장이 세상과 무조건 타협하며 그들의 풍조에 적당히 어울려 살아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5:11에서 그는 다시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음란하거나 욕심을 부리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고 식사도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에 이미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위치나 입장이 보다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실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대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기본 입장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사건 하나를 비판하는 가운데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이란 당시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간에 어떤 알력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들 내부의 그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쾌락본위로 이루어지는 세속 재판에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 바울이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코스모스’, 즉 ‘이 세계’ 혹은 ‘세상’이라고 하는 말은 우주론적인 희랍적 개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불의와 불신이 지배하는 인간의 기존사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이 세계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울이 “성도가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지 못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결국 성도란 비록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는 하나 불의한 세상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과 더불어 이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 부름 받은 구별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안에 있으나 실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 세계를 심판하기 위해 택함 받은 자들이라는 것인데, 이는 앞에 언급한 당시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행해지던 재판형식의 알레고리로서 하나님이 세계를 심판하실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배심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히 그리스도인들의 혁명적인 자의식 내지는 자존심을 봅니다. 세계 안에 살면서도 세계를 무시함으로써 이 세계에 대해 초연 하려는 은둔 생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며 결국은 자기기만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다며 도리어 세계의 불의를 심판할 사명이 주어졌다고 믿는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혁명의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성서는 흔히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나그네’로 표상합니다. 그것은 결코 허무주의나 무상주의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신약성서가 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가야할 목표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세계를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세계 개혁의 사명을 나타낸 것으로서 잘못된 이 세계의 방향을 간섭하고 제동을 걸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기존의 것으로 현재를 심판하거나 과거의 가치관으로서 현재를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눈앞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래하는 새 세계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발을 디디고서 판단합니다. 이처럼 도래하는 그 궁극적인 현실을 믿음으로 앞당겨 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자의 삶은 당연히 혁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세계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일반인들의 생활양식이나 투쟁방법이나 가치 척도와는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러분이 서로 법정에 고소한다는 그 자체가 벌써 여러분의 패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억울함을 그대로 당하지 못합니까?”라고 합니다. 이것은 준엄한 책망이며, 안타까운 호소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그리스도 공동체의 자율성을 강하게 내세웁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내에서 발생한 사건을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가서 그 판가름을 기대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패배를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문제는 그 자체 내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율적인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이 세계를, 아니 천사들까지도 심판할 사명을 가졌다는 그리스도인들의 그 자의식이 얼마나 웃기는 얘기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이 세상 질서와 똑같은 구조와 가치관과 통제성을 가지고 모든 시비를 법적으로 가릴 것을 뜻하는 식의 자율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는 기존 세계에서 이긴다, 이익이다, 손해다, 속는다 등의 기준에 의존한 그런 자율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좀 억울하면 어때! 지면 어때! 좀 속으면 어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차원에 발을 디딘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내일을 오늘에 사는 자, 새 것을 낡은 것 안에서 사는 자 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현재가 기준입니다. 지금의 기준에 의해 지느냐 이기느냐가 좌우되기 때문에 그렇게도 악착같습니다. 그러나 내일을 사는 사람은 내일 앞에서 사라질 오늘을 보고 있기 때문에 수치나 영광의 기준이 엄연히 남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눈앞에 닥친 수난을 피하기 위해 내일을 앞당겨 팔아버리는 자와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의 수난을 감내하는 자! 바로 여기에 비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의 뚜렷한 갈림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정말 이런 분명한 자기 동일성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저 이 현실과 세태에 적응하기에 급급한 인상만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오늘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할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이란 그저 한 줌에 들어올 만큼의 극소수에 불과했고, 아직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공인 받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큰집이라고 볼 수 있는 유대교로부터도 이단자들로 낙인이 찍혔던 그야말로 형편없이 보잘 것 없던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같은 긍지와 자존심, 자기 동일성을 지키며 막강한 세상에 대해 도리어 심판자의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황당한 교만에서 온 자세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으로 씻음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으며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 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의의가 희미해져 가는 이 때에 우리 모두 바울이 제시한 그리스도인 본연의 이 당당한 자존심과 동일성을 회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