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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진노를 사서 무서운 심판을 받았다는 소돔은 고모라와 더불어 마치 하나님의 징벌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는데, 지리적으로 보면 그 곳이 오늘날의 팔레스틴 남부에 위치한 사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사해는 문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라고 합니다. 그 곳엔 염분이 너무 많아 어떤 생물도 살수가 없고 심지어는 그 주변의 풀들도 자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 직접 여행을 해보지는 못했으나 언젠가 그 곳을 다녀 온 분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일대도 화산지역이어서 온통 바위들이 무시무시하도록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그런 삭막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원래 이 지대가 비옥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이 같은 불모의 지대가 되어 버렸을까 하는 것이 그 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문이 되고 있습니다. 「폼페이의 최후」라는 소설이 있고 또 그것이 영화화된 바도 있지만 현재 발굴된 그 폼페이시의 유적을 보면서도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어느 핸가 뮌헨에서 자유교회들이 연합으로 주최한 세미나가 있었는데 그때 폼페이시의 발굴물을 연구하는 미국의 고고학자 한 분이 초대되어 환등기를 비춰가며 한 시간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2천년 가까이 지하에 매몰되어 있던 그 도시가 발굴되어짐에 따라 당시의 문화가 얼마나 화려하고 고도 했던가 하는 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호화스러웠던 도시가 AD79년에 화산이 폭발하여 어이없게도 순식간에 매몰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왜 그 도시가 일순간 그렇게 망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그거야 화산이 터져서 그런 거라고 하면 그뿐이겠지만 누가 그걸 몰라서 새삼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시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어떤 수수께끼가 숨어 있을 거라고 느껴져서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가들은 그 이유를 극에 이른 죄 값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신의 징벌에 대한 경고의 상징처럼 폼페이시를 얘기하며 특히 성적인 문란을 그 예로 듭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남아 있는 벽화들을 보면 성의 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는 오늘 우리로서도 놀랄 정도로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던 사회인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만으로 그 모든 역사과정을 다 납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도시에 지진이 일기 시작하고 화산이 폭발할 징후를 보인 것은 이미 AD 63년부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79년에 그 도시가 완전히 매몰되기까지는 적어도 16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고 또 그 동안 크고 작은 발진을 통해 계속해서 위험에 대한 경고를 받았으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도시 주민들은 그 곳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있다가 그렇게 참변을 당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발굴된 그 도시를 보면 누구나 우선 그 화려했던 생활 흔적에 아연해 집니다. 집의 구조나 목욕탕, 혹은 정원의 형태를 보면 요즘 서구 사람들의 상류생활도 뺨칠 정도로 호화스러웠음을 당장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그때 그 필름을 보면서 역시 그들은 그들이 쌓아 올린 부 때문에 위험을 빤히 보면서도 머뭇거리다 끝내 그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화석이 된 시체들을 보면 거의가 다 무엇인가를 잔뜩 끌어안은 채 죽어 있습니다. 마치 자기가 귀하게 여기던 보물을 마지막 순간까지 안고 뛰다 그만 시간을 놓쳐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소돔이 멸망한 얘기에도 이와 비슷한 요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만 두고라도 우선 롯의 가정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소돔성이 멸망한다는 예고와 함께 거기에서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탈출할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된다는 하나님 사자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롯의 아내가 앞을 향해 뛰다 말고 그만 뒤를 돌아다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왜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다보았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성서에 별다른 설명이 없으므로 역시 추측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아무래도 자기의 소유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미련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려는 것은 소돔의 멸망 이유라든가 거기서 누가 왜 벌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한 개인이 전체에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또 개개인이 전체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개인과 전체의 연대성 문제를 이해해 보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린 소돔을 앞에 놓고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합니다. 그는 우선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신다는 것은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당신의 뜻에 모순된다며 하나님께 항의하고 나섭니다. 그러면서 “만일 이 성중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50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멸하시겠느냐?”고 묻습니다. 놀랍게도 그 물음에 대해  하나님은 “그 50명의 의인을 위해 전체를 살릴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래도 50명까지는 자신이 없어 계속 에누리를 하다 마지막에는 10명까지로 내려가는데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은 “만일 10명만 있어도 나는 그들로 인해 이 성이 당해야 할 운명의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항의하다가 나중에는 의인만이 아니라 그 전체가 살 길이 없는가 하는 문제로 바꾸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결국 하나님은 만일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나는 그들로 인해 내 분노를 철회하리라고 합니다. 의인 10명으로 말미암아 그 집단, 그 사회, 그 민족의 운명이 급 전환하여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저주와 분노의 신이시기 이전에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축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상입니다.


예레미야서 5:1을 보면 “너희는 빨리 예루살렘 거리에 두루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아라. 만일 너희가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감히 한 사람까지는 내려오지 못했는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만일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내 진노를 철회하고 이성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이 성을 멸하고 싶지 않다. 공의를 행하는 자가 단 하나만이라도 발견된다면 나는 이 진노를 멈추리라. 그러니 제발 나를 좀 도와다오!”하며 호소하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에스겔 22장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 백성들은 강포하여 늑탈하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노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부응하였느니라. ”결국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한 사람’을 찾지 못하여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의인이라는 것이 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의인이란 바로 무너진 성을 새로 쌓고, 그 무너지고 뚫린 구멍을 자기 몸으로 막아 하나님의 진노를 그 몸으로 대신할 자라는 것인데, 바로 이런 자를 하나님이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 진노하지 못하게 하는 자’ ‘내가 분을 품지 못하도록 뚫린 구멍을 가로막고 서서 〈안됩니다〉하는 사람’을 찾았건만 결국 그런 사람이 없어서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전체의 운명을 위해 일개인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개인의 결단과 처신 여하가 전체에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개인이란 전체 속에 함몰된 존재가 아니라 전체 속에 있으면서도 그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책임적 존재입니다. 흔히 우리는 진실을 추구하며 뭔가 참되고 정의롭게 살아 보려고 애를 쓰다가도 어느새 변심하여 남과 같은 통속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나 혼자만 그렇게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다 그 모양인데 나 혼자만 정직하게 살아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이란 참으로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분명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사회적인 역학 위에 발을 디디고 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기상도에 의해서 약해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하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 된 다면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라는 분, 뚫어진 성을 자기 몸을 던져 가로막다 죽은 그 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 발을 디디고 선 사람들이요, 한 사람의 의인을 찾아 이 땅, 이 역사를 구원하신다는 그 하나님 신앙에 기반을 두고 선 사람들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을 표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의 몸으로 가로막은 자’, ‘하나님의 매를 자기의 등걸로 대신 맞은 자’, ‘하나님의 저주를 자기 몸으로 받은 자’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바로 무너진 성을 자기 몸으로 가로막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돌이킨 자라고 주장했으며 또 그런 신앙 속에서 살았다. 구약 이사야서 53장에서도 이미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하면서 그리스도 한 분의 희생의 의미가 뭣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보다 더 큰 불행은 우리에게는 이 위기에서 세상을 구출할 의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내 사람됨에 대해 큰 기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막말로 나를 봐서 내 민족을 살려 달라고 할 수도 없게 된 판입니다. 이것이 숨김없는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자기를 표현한대로 어쩌면 우리는 티끌보다 못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체념 속에 주저앉아 불평만을 일삼을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유일한 의인이라는 것과 그 분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몸이라고 하고 우리를 그의 지체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이 곧 의인일 수는 없더라도 의인의 한 작은 지체일 수만은 있다면 우리는 무너진 성을 쌓아 보려는, 그리고 뚫어진 구멍을 내 스스로 막아 보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앞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바로 그의 지체된 자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것이 가능할 것이냐 불가능할 것이냐를 저울질 해보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지레 돌아서는 행위는 장삿속이지 결코 그리스도인의 신념은 아닙니다. 혼자라도 내 길을 가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독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너무도 이상해져서 뭔가 정직하게 살아 가려는 사람이나 뜻을 가지고 좀 바르게 살아 보려는 사람은 아예 바보로 통합니다. 우리는 진실하고 참되게 살아 가려고 애쓰는 자들을 비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스스로도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대인관계 혹은 교회에서 늘 참을 추구하려 하고 진실을 좇으면서 편법이나 거짓이나 사욕을 떠나려는 노력을 해야지 악한 의지와 타협이나 일삼고, 부조리한 현실에 무조건 적응하는 것만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외면해버린 허물어진 성을 홀로나마 쌓고 있는 자, 뚫어진 구멍을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찾는 의인이요, 또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자를 통해 그 민족과 그 사회 그 교회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포기하고 버리니까 나도 떠나겠다는 게 아니라 다 돌아서면 나 혼자만이라도 저 허물어진 성을 수축하겠다는 사람, 안되면 내 몸을 내대서라도 저 뚫린 구멍을 막아보겠다는 각오를 가진 자야말로 정말 남을 구하기 위해 고독하게 죽어간 예수님의 참된 제자요, 그 예수님의 혼을 가진 자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자가 너무도 그리운 때가 바로 이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간 한 사람의 의인이 없어 고뇌하시는 그리스도의 탄식을 들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