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22 10:37

가난한 실존(빌 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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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실존(빌 3:3-16)


누가 나더러 지금까지 가장 많은 영향과 충격을 받은 책 한 권을 들라 한다면 역시 성서를 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성서를 남달리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또 체계적으로 읽거나 연구하겠다는 자세로 읽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단순하고 소박한 눈으로 보는 가운데서도 많은 감동과 느낌을 가졌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아직까지도 변함없는 성서를 향한 나의 기본 입장은 어떤 교리나 세계관이나 윤리 따위를 묻기보다는 언제나 나의 실존을 질문하는 것으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성서가 말하는 실존이란 ‘하나님 앞에 선 나’라는 것입니다.


키엘케고르의 말대로 ‘신 앞에 홀로 선 고독한 단독자’가 바로 성서적 실존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분 앞에 홀로 선 존재입니다. 더구나 자기 치장이나 변호나 은폐가 가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 어떤 것으로도 자기의 치부를 가릴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기록한 시인은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하늘에 올라가도 당신은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를 깔고 누워도 거기에 계시며 새벽 날개를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의 손은 나를 이끄시고, 어둠보고 이 몸 가려달라고 해 보아도 당신 앞에서는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앞’이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입니다. 즉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하나님과 나와의 운명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성서가 바로 이러한 나의 실존을 조명해 주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성서가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손에 쥐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태양의 정체를 포착하겠다고 똑바로 쳐다보다가는 결국 눈이 부셔 점점 더 바라볼 수 없게 되듯이 사실 성서에서 신을 보려고 하고, 구원을 손에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회의에만 빠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만물을 조명하기 위해 있듯이, 그래서 실은 만물을 봄으로써 태양을 알 수 있게 되듯이, 우리는 성서를 봄으로써 무엇보다도 우선 나와 나의 선 자리를 조명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실은 신을 만날 수도 있고 또 구원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은 바울이 자기의 현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굳이 바울을 택한 이유는 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가운데서도 특히 그가 자기이해에 가장 투철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선 두 가지 관점에서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속의 자기요, 또 다른 하나는 미래 속의 자기입니다. 과거의 자기로 말하면 그에게는 정말 내세울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만일 누가 육적인 것으로 자랑하겠다고 한다면 자기는 오히려 더욱 자랑할 것이 많다”고 전제하면서 가장 전통적인 혈통과 가문에서 출생했다는 사실, 또 바리새파에 속했을 만큼 율법상으로도 골수분자였다는 점, 또 진리 수호에 대한 정열도 누구보다 강해 이단으로만 알았던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두에 나서기도 했었다는 이력들을 열거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렇게 화려한 과거를 자기는 다 잊어버리겠다고 합니다. 그가 여기에서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과거가 자기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졌다는 소극적인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가 계속 도전 또는 자기를 포로로 삼으려는데 대한 탈출을 선언한 말입니다. 그 사실은 자기의 과거를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배설물로까지 생각한다는 극단한 표현 속에 이미 충분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노자는 공을 이루었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노자가 그렇게 과거의 공적으로부터 떠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거기에 머물지 않을 때만 실은 거기에 머물 수 있다는 뜻에서 자기의 업적을 되도록이면 오래 빛내기 위해서 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에 안주하고자 하는 역설적인 지혜입니다.


이에 비해 바울은 과거 혹은 뒤엣 것, 즉 업적으로부터의 철저한 탈출을 말합니다. 이것은 노자처럼 도리어 과거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달리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표현대로 하면 앞엣 것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 이 앞엣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혹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또는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의를 위해” 혹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라는 등의 다양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종합하여 한 마디로 말한다면 ‘참된 자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나’, ‘예수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나’라는 것이 곧 참된 자기와 그가 붙잡으려는 앞엣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앞엣 것을 잡기 위해 뒤엣 것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그것이 참된 자기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굳이 과거의 이력을 그렇게 배설물처럼 증오하면서 버려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점을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바울은 그가 가진 것을 자랑함으로써 자기의 삶을 시위했습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가졌다.” 즉 그런 것들을 가진 것으로서 자기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거기서 삶의 보람을 느꼈고 또 그런 것들이 자기 삶의 보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런 것들이 실은 자기를 철저하게 상실하게 한 요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사실도, 바리새파에 속한 귀족이라는 사실도, 율법을 지켰다는 사실도,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최고의 학벌도 실은 참된 자기와는 전혀 별개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 모든 것들과의 단호한 결별을 선언한 것입니다.


가진 것이 곧 나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무엇을 가졌다는 것 이전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진 것이 마치 자기의 삶의 보장이나 되는 듯이 착각하고 거기에 안주해 있는 동안 한번도 자기 존재를 묻지 않음으로써 지금까지 자기를 상실해 온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가진 것이 내 현존에 대한 물음을 은폐해 버린 것입니다. 가진 것에 도취해 있는 동안 참된 자기를 아득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자기 존재에 대해 부단히 물음으로써 현존합니다. 물론 자명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새삼 그렇게 묻게 될 때 오히려 더 비참한 상태에 빠질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 살아야 하느냐? 어디로 가는 것이냐? 참된 삶이 무엇이냐? 결국 죽음에로의 존재가 아니냐? 이렇게 계속 문제를 삼는 데서 불안이 오고, 고뇌가 따르고 또는 절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물을 때만이 고민 없이 살아가는 한 마리의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을 때만이 자연 법칙 아래 살면서도 그것에 예속되지 않고, 전체 속에 살면서도 전체에 흡수되지 않는 ‘나’로서의 책임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물음을 묻지 못하도록 지금까지 자기의 눈을 가리워 온 것이 바로 그 자랑스러운 과거의 이력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제 참된 자기를 찾기 위해 그런 것들을 모두 자기에게 해로운 것으로 규정하고 마치 배설물을 버리듯 송두리째 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과거를 그렇게 내 버린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자기’, 혹은 ‘예수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참된 자기를 찾았다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할 뿐입니다. 아직 얻은 현실, 발견된 현실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나는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또 나는 아직 그것을 잡았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이해한 현존이란 단지 뒤엣 것을 버리고 앞엣 것을 잡으려고 하는 그 틈바구니에 있을 뿐, 아직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존재입니다. 과거로부터 탈출하여 미래를 향해 가는 도상의 존재일 뿐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의 현존을 가리켜 “오직 한가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뿐이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현존! 그것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가난합니다. 그는 그 자체에 어떤 보장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으로서 사느냐’ 또는  ‘나로서 사느냐’의 두 갈래 길에서 「나로 살겠다」고 결단함으로써 잃었던 자기를 되찾은 자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의 것이다”고 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과거의 이력에 매여 있지 않다는 말이요,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것은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오고 있는 미래에 대해 자기를 전적으로 개방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 이력서와 나를 같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종교인들에게서도 똑같은 현상을 봅니다. “나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는 몇 십년 교회생활을 했다. 나는 교리를 알고 있고 그것을 지켜왔다. 나는 이런 경험과 직분과 업적을 가졌다. 나는 목사고 전도사고 장로고 집사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등식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서가 제시하는 참된 실존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자기의 과거를 유감없이 다 내버리고도 아직 뭣하나 잡았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데서 바로 바울의 자기 이해의 실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좌절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앞을 향해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기어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믿음,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얻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정말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되면 참될수록 오히려 자기는 참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마련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이만하면 됐다가 없습니다. 언제나 아직도 아님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자기는 이미 다 된 양으로 여긴다는 데서 바로 큰 혼란이 야기됩니다. 이런 현상은 가진 것에 도취하여 진정한 자기를 상실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그리스도도 구원도 보증수표처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착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참된 실존이란 과거의 업적으로 현재를 향락하려거나 또는 이미 그 무엇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령 과거의 유산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이 곧 나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오직 앞엣 것을 향해 뛰되 아직은 결코 잡았다고 생각지 않는 가난한 사람, 그가 바로 바울이 이해한 실존이요, 또 오늘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성서적 인간상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