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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사랑(고전8:1-12)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을 지적으로 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자문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적어도 현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 물음 앞에 정직히 서야 합니다.


까닭은 대개의 경우 이미 신앙이란 지식화 되어 그저 몇 곳의 성구를 기억하고 교리를 외우는 것으로써 이미 자기가 훌륭한 신자라는 생각에 젖어 있기 때문인데 설령 그의 그런 지식이 옳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과 신앙과는 대체 어떤 관계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을 과연 그러한 지식의 테두리 안에 제한하고 규정해도 좋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역시 두고두고 생각해 봐야 할 과제임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실제 고린도 교회가 당면했던 그런 문제를 놓고 대단히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두고 먹어도 되는지 아니면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논란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오늘날까지도 그 옛 지명이 그대로 쓰이고 있고, 우리 가운데는 이미 여행을 다녀 온 분도 계실텐데, 아무튼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약 87km 정도 떨어진 항구도시로 신약시대 때만 해도 그리이스 최대의 무역항이었습니다. 스페인, 이태리, 시실리, 에집트로 연결되는 항로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언제나 많은 외국 상인들이 들끓었고, 또 항구도시 특유의 음란한 우상 숭배 행위도 아주 심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과 미의 여신인 비너스 신전에서 몸을 팔던 여사제들만 해도 천명이 넘었다고 하니까 가히 당시 고린도의 우상숭배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시장에 나오는 식품들도 대개가 이미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막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의 의식 속에서 우상의 존재를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다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게 될 경우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그 음식으로 인해 자기가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했습니다. 이에 반해 일부 지식층들은 우상의 제물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먹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하나님은 한 분밖에 안계시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하다는 생각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데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자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자들의 태도에 대해 바울은 일단 그들의 지식을 시인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그 지식이 교만을 낳았으며, 그래서 참으로 알아야 할 보다 중요한 문제는 보지 못하고 있음을 신랄히 지적하고 나섭니다.


본문을 보면 우선 1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실제 그럴 것이라고 그들의 지식을 솔직하게 시인합니다. 즉 하나님이 곧 창조주이시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모든 헛된 우상으로부터 자유 하게 되며, 따라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도 자유 하다는 생각이야  말로 확실히 옳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2절에 가서는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그 무엇을 모르고 있는 자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알고 있다는 그들이 대체 무엇을 몰랐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많은 말을 하지 않고 극히 사소한 경우를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지적으로 얻은 그 자유가 때로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유 할 수 있는 권리는 인정하나 그러한 자유인의 행동방식이 때로 아직은 나약하여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자유마저도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자신을 위해서〉는 알고 있었지만〈이웃을 위해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가졌다고 자처하면서도 사랑은 몰랐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비판은 곧 “사랑을 모르고서 어찌 하나님, 혹은 예수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 설혹 안다고 해도 그러한 교리적인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는 반문이 됩니다.


따라서 바울은 지식을 내세워 곧 결론을 내리고 안심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지식은 흔히 인간을 자기 이상으로 확대하거나 과장하여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 말하면서, 3절에 가서는 결론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고 하는데 이 말씀에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체 어떤 현실인가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교육적인 방법으로서 교리문답을 실시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줄곧 그런 교리문답적인 교육에 젖어 왔습니다. 하기야 그것은 대중을 이끄는데 하나의 편리한 방법일 수는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굵은 것만 몇 가지 골라서 개념화하여 주입시키면 대개가 그것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교리들이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굳어져 그러한 교리적인 지식으로써 이미 기본적인 모든 것을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교리적인 지식으로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알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쉽게 대답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 대답하기에 앞서 우선 그런 유치한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모욕을 느낄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겐 더 이상 설교도 필요 없고, 성서를 탐구하겠다는 심정이나 무엇을 간구 하는 일 따위도 이미 필요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은 사람들일수록 무감각해지는 까닭은 이런 소리, 저런 상식쯤은 이미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깐에는 그렇게 다 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끊겨져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기가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참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그를 사랑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알아주신다”는 말씀은 소위 하나님을 지적으로, 관념적으로 안다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다른 것은 결코 다 안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자일수록 참회록을 쓰고, 의인일수록 죄인이라고 고백하듯 사랑하면 할수록 오히려 나는 그를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효자요, 둘째 아들은 부모에게 불효한 이른바 방탕아입니다. 그래서 형은 언제나 그 동생을 구박하고 멸시합니다. 이유는 부모의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맏아들은 자기가 부모의 뜻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런 탕자는 없어지던가, 나가 죽어야 한다고 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즉 그 부모가 그 못난 자식도 똑같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아니 자기보다도 오히려 그 동생에게 더 큰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부모를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부모를 잘 안다는 전제하에 자기와는 다른 동생을 아예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와 똑같은 현상이 언제나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싸움질을 잘하고, 원수를 많이 만들고, 그렇게도 독선적인가를 분석해 보면 모두가 자기만이 진리를 바로 알고 있고, 참과 거짓이 무엇이고, 신앙과 불신앙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예수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로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자기의 지식에만 확신과 절대성을 부여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데서 바로 그런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서슴없이 남을 정죄 해 버립니다. 교회에서 이웃 사랑을 강조해도 ‘마이동퐁’인 것은 바로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지식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아직 효도사상이 생생할 때는 부모님 앞에서는 감히 자기 동생이나 자식에게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소행은 곧 부모님을 욕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안다는 자들이 어떻게 그분의 면전에서 함부로 형제를 규정하고, 판단하고 정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더욱 강조하여 11절을 보면 “약한 사람이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아무리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약한 형제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된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고 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리스도는 그 약한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는 가장 중요한 말을 내세웁니다.


지금 내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 천박하고 못나서 꺼져 버려야 한다고 생각되는 그 약한 형제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고백은 참으로 눈물겨운 표현입니다. 못난 동생을 보면서 동시에 거기서 부모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참 부모를 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나약한 내 형제를 대할 때 그 형제를 위하는 그리스도의 애정을 읽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안다고 자처하는 것은 사실상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나약하여 톡하면 실족하는 자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쉽게 흥분하고 의분을 잘 터뜨리던 바울도 이내 약한 자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고는 다시금 그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잘나고 똑똑한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나약한 형제를 위해서도 오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