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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3일 주일찬양예배
본문: 히 11:17-19
제목: 아브라함의 부활신앙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얘기가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성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품었던 대표적인 의문 가운데 하나가 아브라함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대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100세에 얻은 독자를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바치라고 한다고 -창세기 22장을 보시면 알겠지만- 바칩니다. 일말의 갈등없이 저항없이 의문제기도 없이 묵묵히 하나님이 바치라는대로 모리아 산으로 가서 다 큰 아들을 묶어서 제단 위에 올려 놓고 목을 따려고 목에 칼을 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나오는 얘기니까 예사로 넘기셨습니까? 저는 이 사건을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목석입니까? 아니면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던 사람이었습니까? 이삭을 100세에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독자입니다. 이삭의 어깨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지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저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자식을 주고,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노라 약속하셨는데, 그 많은 자손들이 이 이삭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리라고 약속했는데, 그 이삭을 하나님이 번제로 바치라는 겁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상식에 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해석해 볼 도리가 없는 말씀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주실 때는 언제고, 또 잡아 바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아비가 100세에 얻은 독자를 짐승 죽이듯이 잡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아비에게 이런 명령을 하실 수 있습니까? 할 말이 너무도 많을 것 같은데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모리아 산까지 사흘 길입니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나설 수 있지만 삼일 길을 가면서 다른 곳으로 달아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묵묵히 모리아 산까지 갑니다. 이러고도 어떻게 아브라함을 아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의문이 오랜 동안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을 읽으며 저의 의문은 풀렸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19절입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아브라함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아브라함은 믿음의 위대한 선진입니다. 내가 이삭을 잡아 바쳐도 하나님은 반드시 내 아들을 살려주실 줄 믿고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은 부활신앙입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 내가 죽여도 다시 살려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철썩같은 믿음, 태산같은 믿음으로 이삭을 실제로 잡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완벽히 잡아 바쳐도 새로운 이삭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쇼를 하지 않았습니다. 번제단의 숯불에 내 아들을 완전히 바쳐도 하나님이 이삭을 새로이 주실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이 겁 없이 정말 잡으려고 드니까 하나님이 다급해서 너의 믿음을 이제 알았다며 잡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야 말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임을 확인하십니다. 전혀 주변의 상황이나 환경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는 확신을 줄 근거가 없습니다. 꼼짝없이 아들의 목을 딸 수밖에 없는데, 그는 부활신앙에 자기 목을 내댄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에 하나님이 두 손을 드신 겁니다. 하나님이 졌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이토록 무섭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 앞에는 누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죽어도 산다는데, 내가 완벽히 불에 태워 죽여도 다시 산다는데 그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백기를 드셨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만이 아니라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도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삭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없어지면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 내 목숨 보다 더 소중한 것, 백세에 얻은 귀한 외아들, 건강, 남편, 내 자녀...... .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이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잔인하게도 우리의 이삭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헌금 달라면 바칠 수 있고, 주일성수하라면 할 수 있는데, 이삭을 달라하면 못 내놓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삭을 지키려다가 시험에 들고, 또 다 잃습니다. 이삭을 달라고 할 때도 하나님 제일주의로 아브라함처럼 부활신앙에 목을 내댄 사람은 이삭도 잃지 않고, 하나님도 다시 찾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지키기 위해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이삭도 못 지키고 다 잃습니다. 19절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삭을 바쳤더니 하나님이 그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삭도 되얻고 하나님도 다시 찾았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떠났다면 다 잃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조상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우리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을 본받읍시다. 아무리 모순이고 터무니없어도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면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이삭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삭을 고집하면 다 잃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묵묵히 부활신앙에 모든 것을 걸고 바치면 그 사람은 복 됩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을 받았는지 다 아실 것입니다. 실제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아랍 사람들도, 또 우리 믿는 자들도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성취 되었습니다. 부디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믿음으로 바치십시오. 그래서 그 시험을 꼭 이기십시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