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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일 주일찬양예배
본문: 갈 6:17-18
제목: 스티그마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7절 하반절에 나오는 “흔적”이란 말이 그리스 말로는 “스티그마”입니다. 이 말은 본래 불에 달궈서 가축들의 엉덩이에 찍는 쇠인장을 가리킵니다. 전쟁 포로나 노예들의 이마에 찍는 낙인이 스티그마입니다. 로마 문화권이나 희랍 문화권에서는 파렴치범 곧 신전의 물건을 훔친 사람들의 이마에도 스티그마를 찍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내 몸에 예수의 스티그마를 가졌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어떤 주석가들은 실제 예수라고 새긴 쇠인장을 자기 몸 어딘가에 지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중세 수도사들 중에 많은 이들이 실제 자기들 이마에 쇠인장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실제로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바울이 무수히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하는 중에 예수님을 전하다가 몸에 생긴 깊은 상처를 가리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바울이 돌에 맞아 기절했고, 항해하다가 파선하고, 이방인에게 동족에게 갖은 박해와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몸에 깊은 상처가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바울이 예수의 흔적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의 몸에 무엇이 새겨졌냐가 아니라, 예수의 흔적이라 할 때 여기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은 이제 내가 예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등에 어떤 문신이 새겨졌냐에 따라 야쿠자냐 서방파냐 등이 결정되지 않습니까. 계시록에 보면 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스티그마를 찍는데 그 수가 144,000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스티그마입니다. 계시록 13장을 보면 이번에는 사탄이 자기의 졸개들에게 스티그마를 찍는데, 그것이 바로 666입니다. 어린양의 스티그마는 777입니다. 777을 받으면 하나님의 소유이고, 666을 받으면 사탄의 종자라는 뜻입니다. 전에 전도관의 박태선 씨가 사람들을 미혹할 때 이제 144,000이 다 차가니까 빨리 신앙촌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서둘러 재산정리해서 신앙촌으로 들어갔습니까. 요즘도 이런 황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안상홍입니다. 거기도 144,000을 얘기하고, 여호와의 증인들도 144,000을 얘기합니다. 이것은 상징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무리를 가리킬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문자적이고 숫자적으로만 봅니다. 짐승의 표를 받아봐야 다 마귀의 종자요 사탄의 백성일 뿐입니다.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사탄이 144,000을 내세워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누구의 스티그마를 받느냐가 결국 그 사람이 누구의 소유냐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이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예수의 소유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스티그마는 화인(火印)이기에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몸에 예수의 화인, 어린양의 인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말은 내가 내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졌다는 고백입니다.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흔적이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처절한 고난의 흔적이 지금 내 몸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내가 지금 짊어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주로 산에서 고행을 많이 했습니다. 바닷가, 동굴, 사막에서 고행한 사람들이 많은데, 프랜시스는 산에서 많이 했습니다. 한 번은 그가 높은 산에 올라가 기도하면서 자기 몸에도 바울처럼 아픈 흔적을 갖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새벽에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오며 양손과 양발에 성gms(聖痕), 주님의 못자국이 나타났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주로 고행자들에게 이런 성흔 체험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랜시스입니다. 이때부터 평생을 그는 실제로 예수의 고난을 지고 갑니다. 성흔을 지니고서부터 완전한 성자가 됩니다. 성경에 보면 마지막 날 심판 때에 어떤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하고 저명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행했다는 겁니다. 권능을 행했다는 것은 기적을 행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대단하구나 수고했구나 이제 푹 쉬라고 했습니까. 주님의 반응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그들에게 불법을 행했다고 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다 주님의 이름으로 큰 일을 행하면서 영광만 누리다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짊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몸에 주님의 고난의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주님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누구도 저는 세상에 있을 때 저의 몸에 주님의 남은 고난을 짊어지고 이렇게 왔습니다고 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저명한 선지자로 주님의 이름으로 큰 일을 하다가 왔습니다 했더니 주님은 내게서 떠나라는 겁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흔적을 지고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최후심판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누구도 고난의 흔적 없이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스필버그의 죠스 라는 영화를 보면 인상적인 대목이 나옵니다. 식인상어가 자꾸 나오니까 그 상어를 잡기 위해 해안경비대장, 해양학자, 상어잡이 전문가인 선장이 나섰는데, 상어가 잘 나타나지 않자 그들이 과거의 무용담을 얘기하며 상처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해양경비대장은 뭍에서만 일했기에 경력이 없어서, 내 보일 상처가 없어서 쩔쩔매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훗날 주님 앞에 가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예수의 흔적이 있느냐고 할 때 내놓을 상처가 없습니다. 편안하게 살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부끄러울까요. 요리조리 피하면서 사는 것이 행운이 아닙니다. 편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만이 지혜가 아닙니다. 내 몸에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을 보면 천신만고 끝에 구원의 여정을 끝낸 기독자가 ‘나의 이 모든 아픈 상처를 그대로 그 분 앞에 가져가길 원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왜냐면 이 흔적이야말로 내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소속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웠다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흔적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훈장입니다.

사순절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깊이 사색하며, 바울의 이 고백 앞에서 결단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