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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9일 주일찬양예배 남선교회 헌신예배
본문: 막 11:1-10
제목: 나귀 주인 다락방 주인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본문은 주님이 최후로 예루살렘에 상경하신 대목입니다. 지금 어디까지 오셨냐 하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마을 베다니까지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거기서 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시며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매어 있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황당한 말씀인데 제자들이 실제 나귀를 끌고 왔다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잠시 생각하려는 것은 나귀 주인에 대한 것입니다. 결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희생적 기부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했을까 라는 것입니다. 나귀 주인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을 통해서 최소한 몇 가지 사실만은 짚을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명의 봉사자입니다. 이 사람의 희생과 헌신은 성경적으로 보면 대단히 큰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4-5절을 보면, 이미 5백년 전 스가랴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슥 9:9) 구속사적 사건이었습니다: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어쨌든 이 사건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는데도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나귀 주인의 이름은 소개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빛 없이 이름 없이 봉사해야 합니다. 요즘은 자기를 선전하고 광고하느라 요란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은 십자가 뒤로 숨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만 주님의 영광만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이 받으실 영광을 자기 이름으로 가로 채서는 안 됩니다. 구속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기 때문에 스가랴를 통해 5백 년 전에 예언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귀 주인은 무명으로 남습니다. 아무리 명분이 있는 일이라도 끝까지 숨어야 합니다.

14장으로 가면 최후의 만찬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는 다락방 주인이 나옵니다. 주님께 최후의 만찬장을 제공한 다락방 주인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주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드신 최후의 식탁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위대한 봉사입니까. 그런데도 다락방 주인의 이름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이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보에 헌금하는 사람의 이름을 내는데, 사실 이것은 틀린 겁니다. 철저히 자기 이름을 숨겨야 합니다. 보상은 천국에서 받으십시오.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고 주님이 이 땅에서 얻으신 최후의 밥 한 그릇을 도운 사람, 너무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주님이 바로 그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시며 제정하신 성만찬은 오늘도 우리가 계속합니다. 성만찬의 기원이 바로 그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다락방 주인의 이름이 없습니다.

14장에는 또 한 사람이 나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입니다. 14장 3절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사람들이 이 여인을 꾸짖자 주님이 그 여인을 옹호하며 ‘가만두라며 내 장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일이 기념되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눈치 못 챘는데 이 여인은 고도의 감각으로 향유로써 주님의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극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여인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한 여자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름이 나야 알아줍니다만, 주님은 오히려 이름 없이 빛 없이 봉사해야 그 사람을 알아 주십니다. 그런 무명의 헌신자를 통해 당신의 큰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배입니까? 아니면 보배를 담는 질그릇입니까? 자명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럼에도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보배라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스스로 속지 마십시다. 나귀 주인처럼, 다락방 주인처럼 자기는 감추고 끝까지 주님만 드러내는 참된 봉사자들이 되십시다.

다음으로 나귀 주인은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헌상했습니다. 이 무명의 봉사자가 바친 나귀는 때묻은 나귀가 아니라 순수하고 깨끗한 나귀였습니다. 그야말로 점과 티가 없는 나귀였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루의 첫 시작인 새벽을 바치고, 한 주간의 첫날인 주일을 바치고, 내 소득의 첫째 부분을 바치는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야 순전한 나드가 됩니다. 쓰고 남은 시간, 돈은 안 됩니다. 순고다 떨어지는 물 희석한 향유는 안 됩니다. 타고 다니던 나귀는 안 됩니다. 주님의 것은 첫 시간, 첫 나귀, 첫 소득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는 피의 제사여서가 아니라 짐승의 첫 새끼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자기가 먹던 곡식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바치십시오. 다락방 주인처럼 준비된 방을 드리십시오. 주님은 이러한 헌신자들을 통해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마지막으로 나귀 주인은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자 시험에 들지 않고 내드렸습니다. 이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3절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이 말씀 그대로 나귀 주인은 나귀 새끼를 내 주었습니다. 6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주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나귀 주인은 주님이 나귀 새끼를 쓰시고자 할 때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나귀 새끼는 우리에게 있어 황소 한 마리보다 더 값이 나갔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쓰시겠다는 한 마디에 선뜻 내 드렸습니다. 얼마나 희생적입니까? 그게 조금이라도 아까웠다면 어떻게 300데나리온이나 나가는 향유를 깨뜨릴 수 있었겠습니까? 다락방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객실을 원하실 때 지체없이 내 드렸습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세상에 아까울 것이 없고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데 주님이 쓰시겠다면 참으로 인색한 오늘 우리들입니다. 주님이 나의 객실이 어디 있냐고 하시면 그 때부터 고민하고 시험에 들고 상처를 받습니다. 평소에 하시던 대로 이번에도 걸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좋은데, 이번만은 굳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겠다고 고집하시면, 혹은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고 물으시면, 그건 안 된다며 당장 낯색이 변하고 시험에 듭니다. 사실 나귀도 다락방도 주님 것입니다. 주인이 당신의 것을 쓰시겠다는데도 우리는 종인 주제에 다 제 것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고후 9:7).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보상 이전에 자연의 순리입니다. 씨앗을 범하지 마십시오. 이런 어리석음을 용인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씨앗을 먹어버리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굶주릴 수록 씨앗은 더욱 소중합니다. 내가 오늘 굶는 한이 있어도 자손을 위해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지금은 당장 한 톨의 밀이 썩는 것 같지만 거기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나옵니다. 과부가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주님이 그 여인을 불러 자제시키고 책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당장 저녁부터 굶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주님은 칭찬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헌금자의 영원한 모델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이 잔인하시다고 생각하십니까?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먹지 허기진 아이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요구하실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축복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비상한 헌신을 하면 비상한 축복을 누립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로 가장 넉넉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올해도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이 내가 탈 나귀가 어디 있느냐며 우리를 둘러 보십니다. 나의 새끼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옛날 벳바게의 나귀 주인과 다락방 주인은 한 마디의 댓구도 없이 내 드렸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러한 신실한 봉사자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생명까지도 바치신 분인데 새끼 나귀 한 마리도 못 바친다면 이것이 어찌 우리의 도리이겠습니까? 부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귀 주인이, 다락방 주인이 우리가 되십시다. 결단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