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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상한 갈대
설교본문 사 42:1-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7-06-25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70625m.mp3

20170625m

사 42:1-4

상한 갈대


(사 42:1-4, 개정)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프랑스의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이 1670년에 쓴 유명한 책 <팡세>가 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거기에서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휩쓸리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피조물 가운데 귀하다고 했습니다. 중국을 소재로 쓴 <대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938년에 이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이 우리나라를 소재로 쓴 소설은 <살아 있는 갈대>입니다. 이 책은 1963년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대지> 이후의 걸작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펄벅은 미국 장로교회가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의 딸이었습니다. 펄벅은 중국을 한 단어로 <대지>라고 한 겁니다. 우리나라는 갈대라고 했는데, 생각할수록 절묘합니다. 더구나 그냥 갈대가 아니라 살아 있는 갈대입니다. 우리나라는 가장 나약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민족인데 기적처럼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불가사의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문학의 대가다운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상한 갈대라고 합니다(3절).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도 대단한 통찰이고, 펄벅의 살아 있는 갈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성경이 상한 갈대라고 표현한 것은 훨씬 더 적나라합니다. 갈대만 해도 나약한데 그게 상했다고 합니다. 본문에는 또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옛날에는 다 호롱불을 사용했습니다. 호롱에 기름이 있을 때는 괜찮지만, 그 기름이 마르면 그때부터 심지가 타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때 기름을 채우지 않으면 결국 불이 꺼지면서 연기가 나고 냄새가 온 방에 진동합니다. 본문은 우리를 가리켜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지만, 그렇다고 꺾어버리거나 꺼버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그야말로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서바이벌 현장입니다. 따라서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는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가차 없이 도태되고 맙니다. 상한 갈대는 꺾이고, 꺼져가는 등불은 기어이 꺼지고 맙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지라도 고치시고 싸매서 새 출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환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꺼져가기 직전의 환자였고, 가족도 그를 포기했지만, 주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래서 정말 38년 된 중환자가 새 출발을 합니다. 그가 씩씩하게 일어나 걸은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아무리 절망적이라 해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아 있는 한에는 아직 내일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희망이 있다고 주님은 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인으로서는 절체절명이고 사면초가인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녀는 꼼짝없이 꺼져갈 등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손에 돌을 들고 선 무리를 향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주님이 글을 쓰셨다는 기록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주님이 과연 무엇을 땅에 쓰셨을까요?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저는 주님이 아마도 지금까지 그 여인과 간음한 사람의 명단을 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희가 지금 저 여인을 정죄하지만, 너희 역시 저 여인과 간음한 죄인들 아니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칫하면 자신도 돌에 맞을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신 것은 아직 그 여인에게 가능성, 새 출발의 희망이 있기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주님은 늘 우리 인생을 그렇게 보십니다. 너는 간음했으니 돌 맞아 죽어야 한다가 아니라 실수했지만 너는 아직 살아 있기에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 너를 정죄하는 저 사람들보다 더 맑고 깨끗하게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새 출발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오늘의 내 모습이 나의 전부라고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를 반드시 미래의 빛, 희망의 빛, 가능성의 빛 앞에서 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여인을 돌 맞아 죽어야 할 사람으로 봤을 뿐입니다. 그들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그 여인을 심판하려 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똑같은 대상을 바라보시면서도 180도 다릅니다.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한다가 아니라, 주님은 어제와 오늘은 간음했을지라도 내일은 순결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며, 절대 끌 수 없고, 용서해야 할 대상으로 그 여인을 보신 것입니다. 


오늘만 살고 죽을 것이라면 우리는 단정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게 아무리 상한 갈대여도 내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의 그 여인도 가톨릭의 전통적 해석처럼 그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다면, 극적으로 구원받고 얼마나 성스러운 여인이 되었습니까? 그녀는 주님 최후의 순간까지 가까이에서 주님을 모십니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뵙습니다. 게다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처음으로 전한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녀를 사도 중의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에게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에게 주님 부활을 전했으니 사도 중의 사도입니다. 오늘은 비록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와 정죄 받고 있지만, 내일은 누구보다 더 건강하고 아릅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혹 지금 상한 갈대처럼 흔들리십니까? 꺼져가는 등불처럼 기름이 다 소진되셨습니까? 겉은 멀쩡해도 속은 다 문드러지고, 상처가 나 있고, 위기에 처해 있습니까? 본문이 말씀하는 처방은 여호와를 앙망하라고 합니다(4절). 마태복음 12장 1절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해법입니다. 주님께 구원을 청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이 손에 돌을 들고 나를 치려할지라도 주님은 끝까지 나를 지키고 이해하며 용서하십니다. 세상을 믿지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시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요 살 길이요 미래이십니다. 


해리 볼백의 유명한 찬송시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힘이 없고 내 마음 연약할 때 주님의 능력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 주시고 늘 지켜 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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