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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7일 사순절 둘째주일 낮예배
본문: 롬 6:15-23
제목: 그럴 수 없느니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지난 주일과 지지난 주일의 설교주제는 같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뭔가 좀 달라져야 하는데 거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요 고백이며 과거 사도 바울의 고뇌였습니다. 바울이 비명을 지르며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라”고 합니다. 선을 행하고 싶은데 원치 않는 악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후 약 34년에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회심합니다. 그리고 로마서는 주후 57년경에 썼습니다. 제3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서 목회하면서 로마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회심 후 20년이 넘도록 죄문제로 그토록 갈등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깨달은 것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율법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우리를 정죄할 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이제 죄를 짓지 않게 되었기에 정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단죄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는 칭의(Rechtfertigung, Justification)이라 부릅니다. 의롭지 않은 데도 의롭다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십자가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문설주와 문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대속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상징입니다. 피뢰침 아래 있으면 벼락을 맞지 않듯이 십자가 아래 있으면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면 나의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단 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표현할까요? 하나님께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독생자입니다. 이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한 분의 핏값으로 모든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사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회심 후 20년이나 지나서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정죄할 법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성령의 법 생명의 법만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나 구약의 사울왕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후 타락해서 중도에 버림 받은 케이스가 아니라 미안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택함 받은 알곡 가운데 가라지가 섞여 있듯이 처음부터 그들은 가라지였습니다.

이러면 결정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우선 나도 가룟 유다나 사울같은 가라지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반드시 알곡이라는 보장이 있느냐는 겁니다. 비록 지금은 믿는다고 애를 쓰지만 나도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결국은 그들처럼 실패해서 버림받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맞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엉뚱한 사람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보십시오.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잘 정지작업한 옥토에 뿌립니다. 그런데 씨는 반드시 옥토에만이 아니라 어떤 씨는 돌짝밭, 가시밭, 길가에도 떨어집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택함받은 백성에게만 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엉뚱한 사람이 믿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옥토가 아닌 곳에 떨어진 씨는 끝까지 못갑니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가룟 유다나 사울 왕 같은 사람이 이런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나도 이런 케이스에 해당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우리도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려를 해결할 길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누가 택함 받은 자녀인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다 아니라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는 분명히 택함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 이외에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고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영원히 해방했다는 이제는 마음놓고 죄를 지어도 좋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는 죄의 종으로 살던 옛 사람의 버릇 때문에 불안 가운데 죄를 지었는데, 이제는 안심하며 죄를 지어도 좋은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어떻게 사셔도 됩니다. 아무리 못나게 굴어도, 살인강도짓을 저질러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은혜는 절대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를 보십시오. 그가 언제 자선하며 선행을 했습니까? 그런데 그는 천국에 갔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평생 한 것이라고는 강도짓 밖에 없었는데 천국에 갔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구원은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행의 댓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 이것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선행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필요없습니까? 율법 안 지켜도 됩니다. 그것 안 지킨다고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율법이 구원은 손상시킬 수 없지만 천국가서 누릴 영광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전부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 갑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가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천국은 평준화의 세계가 아니라 차등의 세계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공의롭기 때문입니다. 믿으나 안 믿으나 우리는 최후 심판대 앞에 섭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떻게 살았느냐를 심판 받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우리에게 심은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성경은 2/3 이상이 윤리적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국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서 우리가 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이 땅에 있을 때 얼마만큼 착하게 살았느냐, 얼마만큼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았느냐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는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호리도 남김 없이 공명정대하신 하나님이 칼처럼 심판하셔서 거기에 상당한 영광을 부여하십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순교자하고 숨넘어가기 30초 전에 회개한 사람이 천국에서 똑같은 영광을 누린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여러분,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노력은 조금도 없습니다. 100퍼센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주체입니다. 내가 나의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내 가까이에서 돕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시지는 않습니다. 성화는 내가 애써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체이신 구원에는 절대 실패가 있을 수 없지만, 성화에는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애쓴 만큼 주님이 보상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15절입니다: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 라는 터 위에 각자가 집을 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로, 풀로, 보석으로, 짚으로 집을 짓습니다. 이것이 성화를 뜻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불로 심판하시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폭로됩니다. 짚으로 얼렁뚱땅 지은 사람의 집은 한 순간에 다 탈 것입니다. 나무로 지은 집도 제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해도 다 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타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을 붙이면 불에서 나온 금은 더 빛나는 법입니다. 우리의 성화가 훗날 주님 앞에서 불의 심판을 받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진상이 백일 하에 다 폭로됩니다. 짚으로 나무로 풀로 지어서 마지막 심판 때에 타 버렸다면 그 사람은 지옥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5절을 보면,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사우나에서 불나거나 호텔에서 불나면 벌거벗고 창에 매달릴 것 아닙니까. 목숨은 턱걸이로 건지지만 그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 됩니다. 성화에 실패해도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이 송구스러운 구원입니다. 불구덩이에서 뛰어나와 목숨만 건진 남루한 구원입니다.

지옥도 지옥 나름입니다. 착하고 선하게 산 택함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가도 덜 뜨거운 곳에 갑니다. 마지막 공력이 다 타 버린 사람은 천국가도 누추한 곳에 갑니다. 어떤 사람은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타잔처럼 팬티 하나 걸치고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부가 아닙니다. 성화 문제는 결코 장난이 아닙니다. 나의 천국가서 사는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어떤 희생과 댓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조금이라도 내 공력을 쏟아 부을 가치가 있습니다. 대충 짚이나 나무나 풀로 지으려고 하지 마시고 보석으로 지으려고 하십시오. 그래야 마지막 불의 심판을 견딥니다. 그래서 오늘 19절 하반절을 보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고, 22절에서도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에 구원은 받겠지만 성화가 천국생활에서 내 삶의 질을 결정하는 만큼 성화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부디 올해도 여러분의 인격과 삶이 더욱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올해도 예수 그리스도 위에 짓는 여러분의 집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훗날 천국가서 여러분이 받을 것이 더 없이 아름답기를 기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입니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이 말씀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다 다르다는 뜻입니다. 빛이면 다 같은 빛이 아닙니다. 해의 빛이 다르고 달의 빛이 다르고 별과 별의 빛이 다 다릅니다. 구원도 구원 나름입니다. 떳떳한 구원도 부끄러운 구원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심각하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