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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0일 사순절 첫째주일예배
본문: 롬 7:19-8:2
제목: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늘 본문은 인간의 처절한 자기분열, 소외, 모순,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1절에서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하고, 22절 이하에서는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고 합니다. 마침내 비명을 지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바울의 절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언제 이 죄 때문에 절규했습니까? 당연히 예수 믿기 전이었습니까? 예수 믿은 지가 한참 지나고, 사도가 되어 로마서를 이미 7장까지 쓴 시점입니다. 원하는 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바 악만 행한다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2000년 기독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도 회심하고 사도가 된 이후까지도 죄 때문에 갈등하고 고통받으며 절규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합니까? 이런 모순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비록 예수를 믿고 거듭나긴 했지만 우리 몸에는 죄의 잔재가 있습니다. 죄의 구속력, 죄의 막강한 영향력이 우리 몸에 남아 있습니다. 옛 사람의 습성, 근성이 아직도 내 몸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선보다 악을 더 즐깁니다. 악에 더 익숙하고 죄를 지으면 훨씬 더 편합니다. 분명히 신분은 바뀌었는데 내 몸에는 여전히 죄의 관성이 남아있습니다. 마치 피던 담배 끊기가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끊었다고 해도 내 몸에 니코틴이 남아 있어서 기회가 되면 또 피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죄는 이것보다 더 지독합니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참으로 적극적이고 활달하고 대범하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유학에 얽매이기 시작해서 사고가 경직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냉소적이되고 부정적이 되어서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유대인들도 바벨론 포로시대 때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포로 귀환이후 약 400년 뒤인 예수님 시대에도 자기들의 본래 언어인 히브리어를 쓰지 않고, 바벨론 방언인 아람어를 썼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이 말도 아람어입니다. 죄는 이보다 더 무섭습니다.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죄의 소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소속으로 달라진 것이지 옛 우리의 습관이 새로워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파의 박옥수 집단에서는 사람이 중생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 집단에 다 넘어가느냐면 바로 이 교리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죄 안 짓는 사람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믿는다고 당장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박옥수 집단에서는 중생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아직도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거기에 안 넘어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당장에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 믿거나 안 믿거나 다른 바 없다면 굳이 믿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며 절규한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절규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여전히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합니다. 금방은 절규하던 바울이 뜬금없이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25절 이하를 보아도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한다고 합니다. 8장 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아멘하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위대한 사도가 된 후에도 죄 때문에 절망하던 바울이 갑자기 여기에서 무릎을 치며 감사한 것은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라는 말은 ‘절대’(absolute)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죄를 지으며 살지만, 이제는 나의 이런 삶을 죄로 규정할 법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법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죄와 사망의 법이 있어야 우리의 행위가 죄로 규정되고 사망으로 처벌될텐데 그리스도의 법이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겁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미 죄와 사망의 법을 폐기처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과 성령의 법의 보호만 받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이제 우리와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를 단죄하고 처벌하고 심판할 법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버림받지 않습니다. 죄 지었다고 우리의 신분이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피뢰침 아래에 있으면 살인자도 벼락을 맞지 않지만, 피뢰침 없는 곳에 있으면 성자도 벼락을 맞습니다. 내가 십자가 아래에 있기 때문에 벼락을 맞지 않습니다. 유대인이어서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었기에 그 집을 넘어간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이 어린 양의 피를 칠하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을 겁니다. 만일 애굽 사람이 어린 양의 피를 칠했다면 그 사람은 살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보혈이 중요합니다. 여전히 죄는 짓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그 죄값을 절대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보혈로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대속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내게는 하나님이 죄값을 묻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미 갚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제 아무리 법없이 사는 사람이라도 착한 죄인일 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짓는다 해도 나쁜 고약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대속은 완전하고 절대적이기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것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잘 믿다가 타락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잘 믿었으니 왕이되고 제자가 되었겠지만, 결국 그 두 사람은 자살로 마감합니다. 이 문제에 관한 흔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그들의 중생이 가짜였다는 것입니다. 믿는 척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거짓이었다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그들은 최선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참패했습니다. 그들은 믿다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처음부터 택함받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해석이 맞습니다. 사울과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잘 믿었다가 중간에 실패했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그들은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였습니다. 알곡이 실패해서 가라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알곡만 골라서 뿌렸는데 묘하게도 밀밭에는 가라지도 있습니다. 깜부기를 뿌리지 않았는데 보리밭에는 깜부기가 있습니다. 좋은 볍씨만 뿌렸는데도 논에는 피가 생깁니다. 농부는 옥토에다 씨를 뿌렸는데 그 씨가 가시밭에도 돌짝밭에도 길가에도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옥토뿐만 아니라 가시밭이나 돌짝밭에서도 그 씨가 움을 틔우지만 그러나 선택받은 옥토가 아니면 열매를 못 냅니다. 처음에는 다 움을 틔웁니다. 그러나 뿌리는 내리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나 사울 왕은 처음부터 알곡이 아니었는데 알곡 가운데 섞여있던 가라지입니다. 처음부터 옥토가 아니었는데 씨가 떨어진 가시밭이나 돌짝밭이었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데 제자 가운데 들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싹도 내고 움도 틔우다가 결국 열매까지는 못 가고 죽고 만 것입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 13장에는 그물 비유도 나옵니다. 어부가 그물을 치는 것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인데, 막상 그물을 올려 보면 물고기 외에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부가 물고기만 그릇에 담고 나머지는 버립니다. 물고기가 타락해서 불가사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불가사리입니다. 그런데도 그물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지는 못합니다. 결국 어부가 다 골라냅니다. 불가사리는 폐기처분입니다. 가룟 유다나 구약의 사울 왕은 이런 케이스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카리스마, 하나님의 선물이요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모르시는 분입니다. 결코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을 관리하지 못해서 실패한 경우의 사람들이 가룟 유다나 사울 왕이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말씀을 깨달으십시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