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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3일 주일낮예배
본문: 롬 5:6-10
제목: 카리스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지난 달 25일이었습니까? 나훈아 씨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만, 네티즌들의 글을 보니 나훈아 씨의 카리스마가 압권이었다고 합니다. 나훈아 씨 특유의 카리스마가 2시간의 기자회견을 압도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랬습니까?

카리스마 라는 말은 희랍어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어떤 말보다 많이 나옵니다. 사회에서는 법적하기 쉽지 않은 강력한 권위, 위엄 같은 것들을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카리스마는 좀 다른 뉘앙스입니다. 성경에는 카리스 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은혜입니다. 카리스마는 성령의 은사 할 때 은사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카리스마타 라는 말도 많이 나오는데, 카리스마의 복수형입니다. 카리스, 카리스마, 카리스마타 이 모두 다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뜻의 은사, 하나님의 은혜가 카리스마입니다.

15절을 보면,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고 하는데, ‘이 은사는’ 할 때 은사가 카리스마 이고, ‘하나님의 은혜’ 할 때 은혜가 ‘카리스’이고,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할 때 선물이 ‘카리스마타’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절대적이고 압도적이고 영원한 신성불가침의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영원한 선물이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카리스마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 은사, 즉 카리스마의 실체를 알고 싶으면 너희가 언제 어떤 모습의 사람으로 살 때 구원받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우리가 어떤 모습일 때 주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까? 우리가 잘 믿고 회개하고 금식했을 때입니까? 우리가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하게 살 때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6절의 표현대로라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8절의 표현으로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 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로 살 때, 우리가 죄를 밥먹듯 할 때 뜬금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고 대신 우리를 구출하셨습니다. 아직 우리가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신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자격이나 조건으로 볼 때 우리가 가장 불리할 때, 우리의 상황이 최악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런 성경의 진리, 복음이 용납되십니까?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무언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신했을 때 우리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다셨습니다. 그 은혜, 그 은사가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나 노력, 선행은 조금도 가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카리스마는 실로 대단한 것이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있었다면, 연약함, 죄인됨, 하나님과 원수됨, 불경건함 밖에 없었는데, 저주받아 마땅한 것뿐이었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카리스마의 실체요 진수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매절 마다 후렴처럼 나오는 구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입니다.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거저 받았지만, 하나님은 값비싼 댓가를 치르셨습니다. 이것은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카리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카리스마는 영원합니다. 우리가 가장 악할 때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좀 못나게 산다고 해서 우리를 버리시겠느냐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투자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못난 짓 한다고 베푸셨던 구원을 회수하시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투자하신 것이 너무도 크고 값비싸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은사입니다. 처음부터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고 주권적이었지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새삼스레 조건이나 자격을 논하시며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무효화하시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범한 잘못이나 죄가 아무리 크고 파괴적이라 해도 우리를 위해 대신 희생하신 핏값을 능가하진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한들 그것이 주님의 생명의 값을 압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못나게 굴며 사는 데도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구원을 회수하진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대한 모독입니다.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신 하나님의 카리스마에 대한 평가절하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는 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책하고 자신을 정죄하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면 믿음과 구원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내가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카리스마에 대한 모욕입니다. 내가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헌신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노력의 댓가이지 값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이지 응분의 댓가가 아닙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야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구원이 회수되었다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며 회의에 빠집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데도 하나님이 내 구원을 빼앗지 않으실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 다음입니다.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만 불가항력적으로 믿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언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애를 썼으며, 회개하겠다고 날을 잡은 게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카리스마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그를 덮친 것입니다. 구원얻고 믿은 것이지 믿고 나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못나서 예수를 모릅니까?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더 잘 나서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잘 낫고, 계산도 우리보다 훨씬 빠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안 믿고 싶어도 안 됩니다. 성령이 강제해서 기어이 믿게 합니다. 아무리 엉뚱한 데 돌아다니다 와도 결국엔 믿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은사입니다. 안 믿을려고 뻣대도 하나님은 때려서라도 믿게 하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카리스마는 거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카리스마 앞에 항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맞다가 맞다가 기어이 끌려나오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숙명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믿게 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의 죄문제를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죄가 더 이상 내 구원과 신분은 손상시킬 수 없음은 인정하겠는데, 그러면 이제는 마음껏 죄지으며 살아도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죄를 범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에 대해 죽은 자라 했습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고 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범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닥친 분열이고 모순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죄의 통치, 죄의 지배, 죄의 종, 죄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죄를 선호하는 경향으로부터 내가 완전히 자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요, 성령의 하수인입니다. 소속이 달라진 것입니다. 죄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향한 경향, 죄를 선호하는 욕구, 죄에 대한 친화력을 느끼는 정서는 여전합니다. 왜냐면 죄의 탄력 때문입니다. 어제까지 죄를 지으며 살았던 그 관성 때문에 죄에 대한 친화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듯이 그 죄된 생활의 탄력이 죄를 범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요한일서 8절 이하를 보면,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이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이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한다고 합니다. 본인이 죄를 자백하면 당장 구속당해야 합니다. 구속당하지 않으려면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죄를 자백하면 그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의로우시고 미쁘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공의롭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인데 죄를 자백하는데 용서한다고 합니다. 의로운 재판관이라면 자기 아들이라도 죄있다면 벌을 주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백하면 하나님이 용서한다는 말씀은 옳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모든 죄값을 하나님은 예수님께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죄값을 물었습니다. 더 이상 물으실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치루어야 할 죄값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천국 백성이라는 우리의 소속은 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카리스마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영원하고 절대적입니다. 이것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입니다. 이것을 깊이 확신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