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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건너편으로 가라
설교본문 막 6:45-52
설교자 조성노 목사

2008년 1월 27일 주일낮예배
본문: 막 6:45-52
제목: 건너편으로 가라!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본문 45절을 보면 “즉시” 라는 부사가 나옵니다. 어느 시점을 가리킵니까? 오늘 본문의 앞 기사는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즉시 주님이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이 때에 제자들은 풍랑을 만납니다. 아직 오병이어의 기적과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는 데 말입니다. 기적이 있고 나서도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시련이 있습니다. 그것도 주님이 명하신 뱃길인 데도 풍랑을 만났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도 풍랑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여기서는 주님이 처음부터 제자들과 배에 타고 계신 데도 순항하지 못했습니다. 풍랑이 얼마나 심했던지 제자들은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주님은 왜 우리를 돌아보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 믿으면 풍랑을 만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전에는 세상 편이어서 세상이 나를 건들지 않지만, 지금은 주님 편이기에 세상이 나를 괴롭힙니다. 예수 믿으면 뜻 밖의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이 명하시고 재촉하신 항해임에도, 아니 주님이 처음부터 그 배에 타신 뱃길에도 풍랑은 일어납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주님이 처음부터 우리의 신음과 비명을 다 듣고 계시더라는 사실입니다. 48절 상반절을 보면,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라고 합니다.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나서 주님은 산으로 가셨습니다. 왜 야간산행을 하셨습니까? 고독을 즐기기 위해서입니까?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항해를 명하시고 당신은 산으로 가셨습니다. 항해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이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순항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산에서 기도하시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갈릴리 밤바다 가운데서 풍랑만나 고통하는 신음과 비명도 함께 듣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고난을 다 보고 듣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풍난 만난 현실, 괴로이 노 젓는 모습, 우리의 작은 신음도 다 듣고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밤 사경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48절 중반절입니다: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사경이면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입니다. 제자들은 새벽까지 풍랑과 사투를 했습니다. 얼마나 기진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때 바다 위로 주님이 오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주님을 원망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우리 같았으면 주님께 원망 많이 했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운지 알기나 하시냐며 많은 원망을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밤 사경에 주님이 오시면, 밤새 죽을 고생을 했는데 이제야 나타나시냐며 또 원망을 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가장 적절하실 때 오십니다. 밤 삼경이든 사경이든 주님이 오시는 때는 최적의 때입니다. 늦게 오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필요이상으로 빨리 오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시간에 대한 불만이 대단합니다. 내 조급증, 내 욕심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밤 사경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고통의 순간에 나 혼자만 두냐고 합니다. 우리가 경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표와 주님의 시간표는 분명히 다릅니다. 주님의 때가 진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밤 사경까지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앞장서서 설치다가 제 바람에 일을 그르칩니다. 내 시간표대로 주님이 따라 주기를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 그 시간이고 왜 밤 사경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의 판단이요 결정이신 만큼 그 시간이 가장 이상적인 때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시간 때문에 시험에 자주 듭니다. 아무리 떼쓰고 주님을 협박해도 주님은 우리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내가 순종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의 시간은 무조건 옳습니다. 주님의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셔야 합니다. 올해도 주님의 시간표대로 사십시오. 주님이 내게 다가오시는 밤 사경이 가장 정확하고 이상적인 때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시간에 순종함으로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주님이 제 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처음에 제자들이 주님인 줄 몰랐습니다. 주님을 유령인줄 착각했습니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제자들이 왜 주님을 못 알아 보았을까요? 물론 주님이 바다위를 걸어서 풍랑 속에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이렇습니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제자들의 영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탁해지면 주님을 귀신으로 봅니다. 마태복음에도 이 기사가 나옵니다. 거기서 이 대목을 보면, 주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시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은혜가 식고 영성이 흐려지면 주님이 안 보이거나 주님 마저도 유령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늘 은혜 생활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영성이 늘 투명해야 합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식지 않아야 합니다. 기가막히게 오늘 본문이 지적했습니다: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믿음이 적다고, 믿음이 없다고, 어저께 받은 은혜를 다 쏟아냈다고 그들을 외면하셨습니까? 은혜의 감격이 식었다고 지적하시면서도 제자들을 건져주셨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비명을 질러댄 제자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의 댓가가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이 믿음이고 기도입니다. 기도 보다도 감격 보다도 구원이 먼저입니다. 51절입니다: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상황이 끝났습니다. 주님이 내 운명의 배에 오르시면 그 시간부로 상황은 종료됩니다. 그렇게 사나운 바람이 주님이 배에 오르시자 언제 그랬느냐는듯 잔잔해졌습니다. 주님은 내 주변의 모든 상황, 자연까지도 당신 뜻대로 요리하시는 분입니다. 밤새도록 나를 괴롭힌 풍랑이 순식간에 주님에 의해 제압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독일에 처음가서 6년을 살았던 본(Bonn)이 참 그립습니다. 문화적 충격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본은 인구가 약 20만으로 대학도시입니다. 제가 거기에 있을 당시에는 본이 서독의 행정수도였습니다. 본에는 그 중심에 광장이 있는데, 베토벤 플라츠(광장)이 있습니다. 그 광장 한 복판에 베토벤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광장에서 2-300미터 좁은 골목으로 가면 베토벤의 작고 초라한 생가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베토벤이 사용하던 피아노, 생활가구, 일기장, 작곡노트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베토벤은 참으로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알콜중독자요 매독환자였습니다. 어머니도 결핵환자였습니다. 자식이 넷이었는데 맏이는 죽고, 나머지 셋은 다 폐결핵환자였습니다. 특히 엄나가 폐결핵환자인 경우 젖을 먹이면 자녀는 그대로 전염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또 임신을 한 겁니다. 그 아이를 유산시키려고 백방으로 손을 썼는데 그래도 태어난 아이가 베토벤입니다. 베토벤은 어렸을 때도 유약했고, 중년에는 눈이 멀었고, 마지막에 불후의 명작 <운명>(Scichksal)을 작곡했습니다. 그 <운명>이 초연되던 날 일기장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 운명의 항해사는 오직 주님이시다. 내 기구한 운명의 배를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분은 주님이시다. 주여, 내 운명을 위협하는 저 잔인한 풍랑을 속히 잠재워 주소서.” 여러분들의 운명의 배에도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부디 올해도 저 건너편까지 무사하게 안전하게 항해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