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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13일 제직주일 낮예배
본문: 골 4:7-14
제목: 내 이름은?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신약성서는 27권입니다. 이것을 편의상 분류할 때 골로새서는 옥중서신에 속합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네 권을 바울이 옥중에서 쓴 서신입니다. 물론 바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도 로마 옥중에서 썼지만 그 내용 때문에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많이 개척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과 여건이 갖추어진 오늘날도 교회 하나 개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만 해도 2015프로젝트에서 겨우 개척교회 1개처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소아시아를 도보로 여행하며 최소 15개처 이상을 개척했습니다. 바울의 선교행태를 보면 도시에 정착해서 전도하고 목회한 것이 아니라 교회설립 후 그 도시를 떠났습니다. 그는 순회 전도자였습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 같은 경우는 비교적 오래 있었습니다. 약 3년간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적게는 몇 개월에서 많게는 2-3년 머물면 그곳을 떠나서 다른 지방에 가서 개척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골로새에 교회가 설 수 있었을까요? 본문 12절의 에바브라가 바로 골로새 출신인데, 골로새에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에베소에 사업차 갔다가 거기에서 바울을 만나서 개종하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에바브라가 골로새에 돌아와서 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라 라는 동역자를 통해 골로새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 교회도 관리를 했습니다. 그만큼 에바브라가 신실했고 성실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르침을 잘 따라서 골로새 교회만 아니라 주변의 교회들도 관리한 사람이 에바브라입니다. 바울 주변에는 늘 이런 신실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의 초인적인 선교와 목회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과 사역했던 여러 동역자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떻게 바울을 도왔는지 몇 사람을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두기고입니다. 7절입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대단한 찬사입니다. 두기고는 바울서신에 오늘 본문을 포함해 5번 나옵니다. 두기고는 주로 로마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의 소식이나 편지를 여러 지역의 개 교회에 전달했던 사람입니다. 또한 개 교회의 소식을 수집해 바울에게 보고한 사람입니다. 골로새서도 두기고가 골로새 교회에 전한 것입니다. 15-16절을 보면, 골로새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오늘의 이 편지를 전했습니다. 초대교회는 구약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의 편지를 통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사도들의 편지가 중요했습니다. 편지를 돌려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것을 모아 편집한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어쨌든 두기고는 사도 바울의 전령이었습니다. 에베소서 6장 21절을 보면 이것도 두기고가 전달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4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가 구제헌금을 했는데 이것을 당시 어려움에 처해있던 예루살렘에 전달했던 사람도 두기고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초기에는 대단했지만 나중에는 사정이 어려워지자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이 구제헌금을 모아 도왔는데 이 때에 모은 구제헌금을 전달한 사람도 두기고입니다. 당시에 교통수단이 어떠했겠습니까. 육상으로는 도보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예루살렘까지 갔습니다. 소아시아에서 로마까지는 비교할 수 없이 먼 거리입니다. 지금의 터키 서부해안에서 이태리 로마까지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서 두기고가 가장 고되고 외로웠습니다. 두기고가 없었다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를 우리가 읽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칭찬할 만하지 않습니까. 흔히 어려운 일을 할수록 생색을 내려고 합니다. 힘든 일을 혼자 한다고 투덜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힘들게 하면서도 동시에 인정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두기고 같은 신실한 일꾼이 되십시다. 주님은 지금도 멀고 험한 길을 오가며 헌신한 두기고와 같은 전령사를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 교회 제직들은 두기고와 같은 희생적인 전령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아리스다고가 나옵니다. 이 사람도 바울서신에 몇 차례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세 번, 빌레몬서에 한 번 나옵니다. 이 사람은 바울 곁에서 고난 받는 동역자로 나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폭도들에게 돌을 맞아 혼절하는데 그 현장에 아리스다고가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는데 그레데(지금의 크레타 섬) 앞바다에서 유라굴로를 만나 사경을 헤매는데 이 때에도 아리스다고는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지금도 아리스다고는 바울 곁에 있습니다: “나와 함께 갇혀있는 아리스다고.” 이 말씀은 아리스다고가 지금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바울이 최악의 고난상황에서도 힘을 잃지 않았던 것은 주님의 위로뿐만 아니라 이러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리스다고 같은 서로 위로가 되고 동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편할 때는 같이 있다가도 고난이 닥치면 다 달아나는 것이 세상의 처신이요 처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주의 일꾼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끝까지 바울 곁에서 박해의 아픔과 풍랑의 고난과 감옥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그리운 이름이요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올해 우리 교회 제직들은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십시다. 고난 받는 현장에 늘 함께 있으십시다.

다음으로 11절을 보면 유스도가 나옵니다. 그는 할례당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과는 신앙의 노선이 많이 다른 사람입니다. 바울이 복음주의자라면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이단은 영지주의와 유대주의 곧 할례당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울의 노선과 다릅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런 사람도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품고 용납했습니다. 함께 사역하자고 했습니다. 성격도 배경도 출신교단도 다르고 은사도 다른데 주의 일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함께 동역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할례당까지도 용납했습니다. 율법주의자까지도 용납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고향, 직업, 학력, 생활수준, 정서 따지는데 이것은 다 세속적입니다. 신자는 주의 일을 위해서는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진정한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부름받은 사람은 상대가 누구든 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에 덕이 됩니다. 바울과 할례당,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바울은 대승적으로 그들을 용납했습니다. 복음주의자인 바울도 위대하지만 율법주의자였던 유스도 또한 대단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를 가리켜 함께 부름 받은 종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마가입니다. 10절 하반절을 보면,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합니다. 마가는 원래 1차 전도여행 때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중간에 힘들다고 달아났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전도여행이 힘드니까 밤빌리아 버가에서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싸우고 두 사람이 갈라섰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실망시켰던 마가를 바울이 이해하고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 실수를 하고 반동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력이 있다고 해서 배제하는 것은 안 됩니다. 마가는 이후에 큰 일을 합니다. 마가복음을 씁니다. 바울이 순교하고 나자 베드로의 제자가 되어 베드로가 전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건을 기록하여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이 최초의 복음서이기에 다른 복음서의 바탕이 됩니다. 만일 바울이 끝까지 마가를 배제했다면 그가 마가복음을 저술할 수 있었을까요? 마가는 젊은 시절 한 번은 실수했지만 두 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의사라고 하면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 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을 보면 다 바울을 떠났는데 누가는 끝까지 바울 곁에 남아있었습니다. 바울의 최후를 지킨 유일한 사람이 누가입니다. 학자들은 누가가 쓴 누가복음이 가장 유려한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잘난체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동역하는 사람은 이래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함께 종된 자들은 이러한 사역자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에바브라, 유스도, 마가, 누가, 아리스다고가 우리 교회의 제직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 중 내 이름은 어디에 해당되는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복된 사역자들 중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찾고 확인하는 제직, 성도들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