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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새 세계
 눅 24:16-20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가 다 그렇듯 이 비유에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는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그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은 자들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 자체의 성격을 나타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그 새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말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냐를 설명하고자 한게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를 밝히고자 한 것이고, 동시에 그 하나님 나라의 빛 앞에서 드러난 인간의 진상을 폭로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시오”라는 17절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막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외친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오늘 비유
의 핵심적인 말씀인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시오”라는 초청의 언어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회개하라!” 혹은 “속히 오시오”하는 것은 현재 ‘나’를 비끌어 매고 있는 낡은 쇠사슬을 끊고 탈출하여 과감히 새 세계로 이동하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초청에 아무런 전제 조건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외경에 기록된 것처럼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라든지, 혹은 마태복음에서처럼 예복을 입고 오라는 등의 얘기가 없습니다. 단지 여기서는 무조건 그 초대에만 응하면 됩니다.  그 점을 특히 강조하기 위해서 처음 초청한 자들이 거절하자 그 다음에는 가난한 자, 천한 자, 소외된 자들을 모조리 청해 오라고 했고, 거리와 골목 어귀에 나가 아무나 권해 오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준비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 새 세계는 결코 추측하거나 상상할 수 잇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일 수 없습니다. 지금의 가치나 개념, 또는 지금의 언어와는 완전히 단절되는 현실이어야 정말 새 가능성이 됩니다. 따라서 그 초청에 응한하는 것은 모험이며, 모험에는 무엇보다도 결단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비유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 세계에로의 초청을 통해 인간의 진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과 바람직한 인간형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인물들에게 이미 초대장을 보내고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낸 다음 다시 종을 보내어 이제 다 준비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 초대를 거절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청중들에게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가 쉽게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초청장을 이미 받은 민족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출현하여 하나님 나라를 외치며 속히 hd라고 청했을 때는 모두가 외면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예수가 유대 민족의 우선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들의 불신앙을 폭로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초대에 대한 그들의 거절 이유들이 그들의 진상을 더욱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산 것’ 때문에 초청에 불응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를 샀다, 밭을 샀다, 결혼을 했다”등입니다. 당시의 유대 관습대로 하면 결혼도 경제가 허락하는 만큼 다처권이 보장되고 있었으까 실은 아내도 산 것이 됩니다. 그들은 모두가 내 것으로 만든 것, 즉 소유한 것 때문에 그 초대를 거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본문이 소를 사고, 밭을 사고, 결혼을 하는 것,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기와 우유를 먹고, 땅을 갈아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소가 반드시 필요하고, 씨를 뿌리고 곡식과 채소를 얻기 위해서는 밭이 필요하며,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는 데는 결혼이 필수적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정상적인 인간생활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가장 보편적인 조건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가 우리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부분은 그런 소유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초대마저도 거부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으로 인해 본질적인 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에 매달려서 절대적인
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를 염려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산 것 때문에 초청에 불응했다는 얘기는 일상적인 현실에 혹은 자기의 소유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때 자칫 하나님의 미래, 하나님의 나라와는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윤리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고, 지위나 체면일 수도 있고, 자존심이나 오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런 갖가지의 소유가 새 세계 혹은 신의 나라로 향한 인간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은 생각해 볼수록 실감이 가는 얘기입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먹을 것을 입에 문 짐승이 다른 것들을 피해 굴속으로 들어가듯 뭔가 자기가 소유한 것에 집착하는 자들의 생리란 언제나 변혁 따위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확보해 놓은 자기의 소유가, 그 기득권이 손상을 입거나 침해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역사란 어떤 면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 투쟁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보수는 기득권에 대한 미련 때문에 새것이라든가 미래에 대해서는 극히 폐쇄적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초대에 거절한 처음 초대받은 자들로 비유되고 있는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기득권 의식 때문에 새 세계에 대해서는 아주 폐쇄적이었고, 이웃관계에서는 매우 배타적이었습니다. 원래 가진 자의 기득권이란 그들의 권리가 인정되는 사회질서가 그대로 유지될 때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교권을 확보한 유대인들로서는 예수님이 외치는 새 세계 또는 새 질서를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대로만 있어 다오. 그래야 나의 기득권이 보장된다.” 이것이 바로 뭔가를 소유한 보수주의자들의 염원입니다. 그러기에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렵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정치계나 문화계나 종교계나 할 것 없이 권력, 교권,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면 그 순간 사람들은 모두 보수적이 됩니다. 그것은 혁명을 기치로 내세운 공산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맑시스트인 에른스트 블로흐는 오늘날의 공산주의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되어 현집권층의 어용물 이상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새삼 인간은 무엇을 희망하느냐로써 현재가 결정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어쨌거나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대에 의해 소유에 집착한 나머지 그 초대를 거절하는 인간형이 먼저 폭로되었습니다. 주인은 대단히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종을 보내어 이번에는 거리로 다니며 가난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모조리 청해 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가진 것이 없는 무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에 대해 오늘 본문은 오로지 부정적인 면, 소극적인 면만을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지만, 혹은 그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천한 자들이지만,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남달리 깨끗한 마음씨의 소유자들이라거나 혹은 종교심이 유독 강한 자들이라거나 하는 등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인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잔치 자리에 초대되어 올 수 있었던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단순히 그 초청에 응했다는 사실 뿐입니다. 또한 그렇게 초청에 응할 수 있었던 것은 소유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듣던 당시 유대 청중들의 귀에는 이들이 바로 당시 유대 종교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라고 이해되었을 것이고, 초대 그리스도교의 귀에는 아마 이방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하여간 그 어느 쪽이든지 간에 그들은 궁극적인 삶의 거점을 현재나 소유에 둔 자들이 아니라 미래와 가능성과 새 세계에 둔 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세계에로의 초대는 어느 한 부류에게만 향한 것은 아닙니다. 새 세계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부류에게는 열린 문이요, 다른 한 부류에게는 닫힌 문입니다. 까닭은 그 미래의 세계란 그 자체로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그 새 세계에 직면한 각 개인의 결단으로서 창조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앞에 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란 소유에 몰두한 나머지 실존을 상실한 나의 치부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나로 하여금 그런 상태로부터의 탈출을 명령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그 나라에로의 초대란 어떤 특정한 상황, 가령 예배나 기도 또는 교회라든가 그 외에도 어떤 거룩한 장소 같은데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일상생활 한 복판에 있는 나에게 전해집니다. 소를 사고 있는 나, 밭을 사고 있는 나, 결혼을 하고 있는 나, 길을 가고 있는 나, 남을 속이고 기만하고 있는 나, 불행한 나, 즐거워하는 나에게 전해집니다. 따라서 이런 부름은 일상성에 갇혀서 질식하려는 나에게 돌출구가 되며 탈출을 가능케 하는 신의 손길이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이 부름을 거부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소유한 것이, 혹은 지금 내가 사고 있는 것이 나를 살리고 내 삶을 보장해 주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주객이 전도되어 내가 그 무엇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실은 내 소유물에게 도리어 내가 소유 당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자유마저도 내 소유물에 의해 박탈당하고 마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절대화하지 않을 때만이, 자기의 소유에 안주하지 않을 때만이 소유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성서의 교훈은 바로 그런 차원의 가르침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사는 탈출에서 시작됩니다. 애굽의 종살이가 자명한 현실이 되어 별다른 불편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비굴하게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가나안이라는 새 세계로 그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이 부름 앞에서 그들은 비로소 현재 자기들의 삶이 실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는 자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부름에 모두가 응해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탈출도상에 계속적으로 주저앉는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이유는 새 세계로 가기까지의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투쟁의 길이고 보니까 차라리 비굴하게 살았으나마 그래도 애굽에서 종으로 살 때가 편했다는 과거에 대한 헛된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즉 추한 과거에 집착하는 추억이라는 소유에 사로잡혀 미래나 새 세계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려 거나 현재에 주저앉으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처음 탈출했던 제 1세대는 여호수아 한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새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어야 했던 비극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사자의 경고를 받고도 소돔성을 탈출하여 구원의 성인 소알을 향해 뛰어가다가 뒤에서 불타고 있는 그 화려한 재산이 아쉬워 고개를 돌린 순간, 그만 영원한 소금 기둥이 되어 새 세계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창세기의 설화도 소유에 집착하는 행위가 얼마나 치명적인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새 세계를 향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자칫 긴장이 풀려 안일한 사고에 사로잡히거나 소유에 집착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에 주저앉게 되어 결국은 오늘 본문의 결론이기도 한 24절 말씀처럼 “전에 청하였던 사람들은 아무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면치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 앞에서 다시 한 번 자기의 가치관을 재조명해 보고 과감히 삶의 괘도를 새롭게 수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