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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서 만나자!
막16:1-8


맨 처음에 기록된 복음서로 알려진 마가복음서에 의하면 갈릴리의 여인들이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데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도 만나지 못하고 단지 다음과 같은 천사의 전갈만 듣습니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 나셨고,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라, 여기가 예수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그대들은 지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고 전하라.”
이것이 마가복음서의 결론입니다. 그 뒤에 계속되는 괄호 안에 든 9절부터는 오래된 사본에는 없는 내용으로, 아마 후대에 와서 삽입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이 곳 예루살렘 말고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는 것으로 복음서가 끝났다는 사실은 당시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와 오늘 우
리들에게까지도 많은 시사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가 부활하신 곳이요, 좌절한 제자들이나 그를 따르던 여인들이 슬픔에 잠긴 채 아직 묵고 있는 그 예루살렘이 아닌 먼 갈릴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자고 했을까요.
예루살렘은 결코 만남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정치와 종교가 함께 놀아난 권모술수의 장소요, 거짓이 진리를 누르고, 증오가 사랑을 유린하고, 죽음이 삶을 조롱한, 그야말로 싸움과 거짓과 악한 힘이 득세하던 그런 장소였습니다. 로마 정권과 유대 종교지도자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야합하여 십자가에 높이 못박아 죽인 예수님의 피가 아직 골고다 언덕을 적신 채 미쳐 마르지도 않은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억울함과 분노에 가득 차 좌절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만약 예수님이 예루살렘 어디에선가 만나자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아하! 이제 복수하기 위해 궐기하려나 보다”하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이란 끝까지 대결의 장소지 통합의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굳이 먼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그 곳은 바로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처음으로 맺어진 곳이요, 사랑과 복종, 그리고 평화만이 지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대립, 분열, 싸움 이전의 장소며 그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첫사랑의 장소에서 그의 제자들과 재회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여간 낭만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마가복음서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더 이상 보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나 다른 복음서들을 눈여겨봐도 그 후 제자들이 예루살렘이나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을 향해 복수하기 위해 진격한 듯한 흔적은 전혀 없고 오히려 갈릴리를 기점으
로 하여 유대와 헬레니즘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했으며 끝가지 갈라진 관계를 다시 묶으려는 통합에의 길로 매진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에게 과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심각한 대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온통 괴리와 상반, 그리고 부조리와 갈등으로 가득 차 잇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울고 잇습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개인이나 사회 일반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고, 심지어는 교회간에도, 교회내부에도, 신자간에도 또는 가정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연한 현실을 마치 없는 듯 눈감아 버릴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이 숨막히는 대립의 상태를 그대로 계속해 갈 수도 없는 딱한 처지에 있습니다.
역시 우리가 살길은 너와 나, 하나님과 나, 혹은 내 안의 이 대립성에서 해방되어 다시금 화해와 통합의 만남을 이룩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대결의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싸움의 현장에서는, 피 흘리는 증오의 현실, 미움과 갈등 구조 속에서는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십니다.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지배하던 그 첫사랑의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체념과 좌절 속에 죽치고 앉은 사람들에게, 혹은 증오 때문에 이웃을 등진 사람들에게, 혹은 왠지 예수님과의 관계가 옛날 같지 않고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지금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갈릴리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좌절된 너와 나, 대결하고 있는 너와 내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장소인 그 갈릴리를 정말 알고 있는가. 헤어진 교회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갈릴리를 알고 있는가. 거기서, 바로 거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과연 우리가 그 갈릴리를 알고 있는가, 아니 찾고나 있는가 하는 것입닌다.
물론 그곳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팔레스틴의 그 갈릴리일 수는 없습니다. 사이가 나빠진 부부에게는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고백했던 곳, 관계가 멀어진 친구지간에는 그들의 아름답던 우정의 시대, 예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사람에게는 뜨겁게 주를 사랑하던 그 첫사랑의 순간이 모두 갈릴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는 자리를 바로 갈릴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든 그 영을 받기 위해 기도했고, 그 영 앞에 함께 복종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너와 나와의 대립관계, 적대관계가 무너지고 화해가 이루어 졌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성령을 가리켜 화해의 영, 평화의 영이라고 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누가는 교회의 탄생을 오순절의 성령강림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강림의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인가?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쓰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방언이 터져서 각국으로부터 온 순례자들이 각각 그들의 말로 사도들의 방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바로 단절된 언어의 담이 무너짐으로써 하나의 통합된, 일치된 공동체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서로간에 말과 뜻이 통하는 공동체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뚜렷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소위 기도하고 뜨거운 성령의 불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서로 말과 뜻이 맞지 않아 분열하고 작당하는 일들이야말로 이미 그 근원에서 틀린 것임을 말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의 뜻을 정면에서 거슬리는 악한 의지에서 온 행위입니다.

바울은 특히 이 갈릴리를 엔 크리스토(in Christ) 즉,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을 가리켜 헬라인이나 히브리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상전이나 종 할 것 없이 모든 관계에 있어서의 담이 무너지고 혈연이나 지연마저도 극복되어 모두가 한 형제, 자매가 되는 통합의 장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담이라고 한 표현은 유대인들의 성전구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성전 뜰에는 네 겹의 담이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그 제자들 사이, 또 그들과 유대 남자들 사이, 유대 남자들과 유대 여인들 사이, 유대 여인들과 이방인 사이에 각각 담이 쌓여 있었고, 그 마지막 담 입구에는 만약 이방인들이 이 안으로 들어오면 죽으리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실제 이방인들이 그 담을 넘으면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로마가 유대를 장악한 후에도 로마 당국이 점령군들에게 성전의 그 마지막 담만은 절대 넘지 못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란 오늘날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무서운 장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대인 대 이방인의 감정을 그대로 압축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무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무할례당이란 그들의 눈에는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 불에 가장 잘 타는 땔감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지옥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그 같은 폐쇄성, 배타성은 극단화되어 이방인과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고, 만일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혼을 하게 되면 그는 죽은 사람과 같다고 보아 장례식까지 치를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그 죽음의 사선과도 같은 장벽을 헐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념이 아니라 그들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원수지간의 그 죽음만큼이나 절대적이던 담이 언젠지 모르게 자기들에게서 헐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놀라운 사실을 원수이던 이방인들이 이제는 유대인인 자기들과 함께 같음 믿음, 같은 희망을 가진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현실 속에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같은 시민, 같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치적으로나 무력으로서나 외교로서 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룩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리스도 안이 바로 참된 갈릴리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거기에서 용기를 얻어 국가와 민족간의 담을 뛰어
넘어 전 세계를 향해 진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화해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도 분열과 작당을 일삼고 불화와 긴장을 조장하는 사람은 본인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지배하는 세계인 그리스도 안이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처럼 단절됐던 서로의 의사가 통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새롭게 만났던 갈릴리처럼 일치와 화해와 통합이 이루어지는
그런 곳입니다. 이념도 지연도 혈연도 지위도 연령도 초월하여 모두가 한 주님의 자녀로 만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사로운 인간적 감정쯤은 언제든지 초월할 수 있는 열려진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분열되고 그간 어떤 양태로 긴장관계를 이어왔던지 간에 이제 그런 과거지사는 다 털어 버리고 화해와 말과 뜻이 통하는 그런 귀한 만남이 이룩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