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31 12:37

새 질서(마 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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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질서
마 20:1-10

포도원을 경영하는 한 주인이 일군들을 고용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거리로 나갔습니다. 아마도 추수 때인 것 같습니다. 그는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을 주기로 하고 일군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는 다시 제 삼시, 요즘 우리 시간으로 하면 오전 9시에도 거리로 나가 봤는데 여전히 일거리가 없어서 서성거리는 실업자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도 하루 분의 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12시와 오후 3시에도 각각 거리로 나가 일군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질 무렵인 오후 5시에도 거리에 나갔는데 여전히 몇몇 실업자들이 서성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을 하려고 해도 고용해 주는 이가 없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주인은 “그러면 당신들도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라는 말로써 그들마저도 채용합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마침내 해가 져서 주인이 일군들을 불러 품삯을 지불하는데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먼저 불렀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실 이들과는 구체적인 계약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들에게 하루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먼저 온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들의 삯은 그 보다 더 많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하루종일 일한 사람들에게도 일률적으로 한 데나리온만 지불할 뿐 그 이상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일군들이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마지막에 온 일군들은 한 시간 밖에는 일하지 않았건만 당신은 하루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땀을 흘려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고 항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노사 문제를 취급한 한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항의는 이를테면 사회정의의 한 원칙인 노동과 분배의 불균등에 대한 투쟁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본문에 나오는 고용주는 노동자들의 그 같은 항의를 깨끗이 거부합니다. 도리어 그는 “당신들에게 나는 불공평하지 않았소. 당신들은 나와 한 데나리온을 계약하지 않았소? 그러니 당신들의 삯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마지막에 온 사람들에게도 당신들의 삯만큼 준 것은 내 마음이요, 내 돈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왜 나의 착함이 당신들의 눈에 거슬린단 말이요?” 라고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주인의 이런 태도가 사회정의라는 차원에서 볼 때 과연 정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의 눈에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항의에 타당성이 더 있다고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주인은 노동의 대가에 대한 분배균등의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주인을 변호하여 마지막에 온 사람들은 비록 한 시간 밖에는 일하지 않았지만 하루종일 일한 사람들 못지 않은 능률을 올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전혀 그런 흔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포도원 주인도 결코 그런 식의 이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내 돈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또 우리는 주인의 그 말대로 소유권은 주권과 더불어 신성불가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 역시도 객관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공산주의에서는 소유권 주장이 곧 사회정의의 암입니다. 또한 사유재산이라는 것도 남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니면 이 주인이 실업자들에게 일거리를 주되 강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주권을 존중하여 피차 계약을 채결하고 또 그 계약을 끝까지 이행한 사실을 내세워 그가 사회정의를 해친 게 아니라고 변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약 자체는 이미 자본가와 실업자라는 불합리한 계급사회를 전제로 한 계약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권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주권을 강매할 수밖에 없는 실업자의 약점을 이용한 하나의 착취행위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주인이 나중 온 사람에게도 하루 생활비를 지불한 것은 먼저 온 사람들을 희생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재산을 희생시켜서 베푼 자선이라는 사실을 내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해지는 사회사업과 같은 것으로 노동자들의 자주적 능력과 또 저항력을 마비시킴으로써 결국은 자본가가 자기의 생명과 소유를 지키려는 고등한 악의라고 맞설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 속에서 어떤 사회문제의 원칙을 찾고 거기서 사회정의의 근거를 밝히려고 들면 결국 이런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사회문제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1절에서 전제하고 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기존 사회의 질서나 또는 그것에 바탕을 둔 정의관을 변호하려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질서, 새 질서를 말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기존 사회의 가치관에 길들여지고, 기존 사회 질서의 한 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는 그야말로 진지한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 속에 나타난 새 질서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일까요?
가톨릭과 루터파 교회의 일부에서는 이 비유를 늦게 온 사람이 먼저 보수를 받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먼저 부름 받은 사람이 오히려 나중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로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이 텍스트를 ‘회개주간’의 첫 설교 본문으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본문 제일 마지막 절에 나오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것이다”는 말씀을 이 비유의 결론인 것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10절의 그 말씀은 마가복음 10:31, 누가복음 13:30, 마태복음 19:30에서 보게 되는 바처럼 원래 이 비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전혀 독립된 격언과도 같은 자료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결코 나중 온 노동자에게 먼저 삯을 지불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일을 적게 한 사람에게 그 노동량과는 상관없이 하루 생활비인 한 데나리온을 줬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주인의 일방적인 선행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공로나 업적과는 관계가 없는 질서, 의무와 권리를 기반으로 하는 일반 사회질서를 완전히 초월한 전혀 새로운 현실인 것입니다. 받았기 때문에 줘야 하고, 일했으니까 삯을 받아야 하고, 기능에 따라 분배되고, 제3자적인 기준이 너와 나 사이에 끼어 들어 심판함으로써 계급이 생기고, 이해관계에서 피차 싸움이 생기고, 이기느냐 지느냐, 손해냐 이익이냐,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따위의 긴장이 발생하는 그런 현실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그 어떤 관념이나 기준도 개입되지 않고, 인격과 인격이 신뢰와 사랑으로 만나는 그런 현실입니다. 이 만남은 주는 자유, 사랑의 자유만이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슬퍼하는 자, 미움 받는 자들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 기존 사회질서 속에서는 설자리가 없는 무능한 자들의 것입니다. 그 나라는 능력 있는 어른들보다 오히려 어린애 같은 인간이 높임을 받는 나라요, 어떤 조건, 어떤 과거, 어떤 가치도 묻지 않고 오직 잔치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시오 하는 그런 세계입니다.
자,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가 노동과 대가, 의무와 권리라는 교환시장의 현실 세계에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며 제시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비유인 것입니다.
바울은 노동의 대가로서 보수를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질서에 대해 이 새로운 질서를 가리켜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은혜’의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질서입니다. 바울은 원래 율법을 지키고 못 지키는데 따라서 그 운명이 결정된다는 율법의 질서에서 바로 이 새 현실에 뛰어든 결단을 한 사람입니다. 이 새 질서는 기존 질서에서 볼 때는 미련한 것이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황당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미련해도 나는 그 안에서 살고, 그것을 전하겠다며 자기를 내 댄 이가 바로 바울입니다.
어쨌거나 오늘의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란 어떤 업적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바울이 말한 은혜의 질서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구원도 하나님의 나라도 가당치 않습니다. 남만큼 기도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남만큼 헌금을 많이 드린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선을 베푼 것도 아니고,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본 적도 없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녔거나 남다른 충성을 한 적도 없는 주제니까 지옥을 가도 아주 아랫목으로 갈 사람인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 세상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다르다는 데에, 업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구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데에 바로 나 같은 사람도 구제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이 설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바로 우리가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한 것과는 상관없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노동자의 감격과도 같은 것입니다.

올 한해를 살면서도 우리는 이것저것 많은 것을 수확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모두 자기 공로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등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수확이 내 수고의 대가인데 대체 누구에게 뭘 감사하라는 것인가.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란 은총이요, 은혜라는 느낌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삶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계약의 의무만을 이행하는 것으로써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끝까지 남에게 주어야 하는 사랑의 빚쟁인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언제나 먼저 온 노동자들의 항의와도 같은 현행질서의 도전과 저항이 따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으로부터 배울 점은 그가 새로운 질서로써 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또는 기존질서의 의무로부터 도피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존질서 안에서 이루어진 개개인간의 계약 의무를 유린하지 않고 그대로 다 이행합니다. 즉 그는 이 현 사회질서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전제하고 그 한복판에서 그와는 상반된 또 하나의 다른 현실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거기에는 두 질서간의 긴장이 발생할 수박에 없으며 또한 거기에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고민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것과 싸우면서 끝가지 오고 있는 이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증거하고 그 새 질서를 앞당겨 실현해 가야 하는 것이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