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395

권위와 저항
마21:12,23-27

 지금 우리에게는 최근 국내에서 야기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나라 밖에 멀리 떠나 있다는 것으로 그저 강 건너 불난 집 구경하듯 방관할 것인가, 아니면 비록 이곳에 있더라도 나름대로 어떤 입장을 가다듬어 심적으로나마 그 현실에 동참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는 바로 그런 문제를 놓고 함께 고민해 보자는 뜻에서 주제 설정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시장화된 것을 목격한 예수님은 홀홀 단신으로 나서서 장사하는 무리들의 집기들을 둘러엎고 비둘기와 양들을 몰아내면서 “너희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소리소리 지르시며 의분을 터트리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그런 행위에 대해 일반인들과 젊은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찬사를 보냈는데 소위 성전 주인을 자처하던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분개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행위가 옳으냐, 그러냐 하는 문제 이전에 도대체 예수라는 작자에게 성전을 정화할 수 있는 어떤 권리가 있느냐 하는 게 더 문제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신은 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를 당신에게 주었단 말이오? 하며 대들었습니다.
 사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당시 예수님의 그 행위는 분명 하나의 난동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난동이란 기존 질서가 주는 권한 이외의 일을 폭력적으로 저지르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인된 성전 관리인들이 엄연히 따로 있는데 아무런 자격도 없는 한 무명의 시골 청년이 그 같은 폭력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린 것이 정말 정당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코 그런 것 같지 만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그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는 꼼짝없이 범법자요, 사회질서 교란자로 처벌 될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예수님에게 권위를 따진 그 성전 주인이라는 자들의 질문도 한번쯤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물은 ‘권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권위적 존재라면 우선 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을 들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들의 권위가 인정되어 온 것은 이를테면 제사장은 모세와 아론의 후예로서 백성을 대신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집례하는 자였기 때문이고, 서기관은 율법을 가르치고 풀어 주는 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장로들은 백성을 지도할 수 있는 지혜와 덕을 갖춘 원로로서의 지위를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가 유대 전통사회의 제도적인 기구에 의해 그들의 권위를 공인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께 “대체 무슨 권위로 이 같은 행위를 하느냐”고 물은 것은 “너는 모세나 아론의 후예인 제사장도 아니고, 공인된 서기관도 아니며, 또 백성들 가운데서 추대된 원로도 아닌데 어디서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느냐”는 엄중한 문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는 언제나 그런 권위를 거부하는 분이셨습니다. 권위를 내세우기는커녕 도리어 권위에 도전해 싸운 분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이 묻는 권위의 근거를 제시하기보다 오히려 즉각적인 반문으로써 정말 그들이 요구하는 권위만이 전부인가를 반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나도 한가지 물어 보겠다 대답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느냐?” 예수님의 이 날카로운 반문에 그들 역시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런데 왜 그를 믿지 않느냐?”는 비판을 면치 못할 테고 만약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그를 예언자로 믿는 군중들의 분노를 살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 역시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하여 그들의 입을 봉쇄해 버린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말하지 않겠다며 서둘러 그 언쟁을 끝내고 맙니다.      
  권위란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은 소위 민주주의와 더불어 각성된 의식입니다. 이제 권위란 국가 권력이나 사회 일반에서 뿐 아니라 종교 안에서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여간 일체의 권위를 타파해 버리자는 것이 현대인들의 지상 과제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오늘의 권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부모와 선생, 정치인들을 싸잡아 구세대라 하여 무조건 저항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한 예수님도 확실히 권위주의를 정면에서 거부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오늘의 젊은 세대와도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 자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오늘 우리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권위를 묻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도리어 예수님 편에서 던진 반문은 요한의 세례에 관한 것으로서 그것이 사람의 권위로 행한 것이냐 하나님의 권위로 행한 것이냐 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반문에서 먼저 지적할 수 잇는 것은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권위와 하나님에게서 오는 권위가 뚜렷이 구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의 권위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까닭은 그 역시도 당시의 기존질서 속에서는 그렇게 세례를 베풀고, 사회악을 고발하고 회개를 촉구할 수 있었던 어떤 자리도 허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사장도, 서기관도, 장로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제 올 하나님 나라의 빛 앞에서 현재를 심판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가 여기에서 말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그의 권위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요? 세례 요한의 그것처럼 그의 권위도 기존의 가치관에 의해서는 결코 입증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시 그가 말할 수 있었다면 그도 이미 낡은 질서에 속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한 나라에 혁명이 일어나도 혁명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행위를 뒷받침하는 사상은 반드시 지금까지의 기존질서 속에서는 아무런 권위도 못 가졌던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록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도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권력을 찬탈하는 쿠데타 이상일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은 근래의 한국의 정치현실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그 권위의 거점을 두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존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현실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어떻게 현 질서의 가치관이 승인하는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은 어떤 권위인지를 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일관된 태도였습니다. 사회가 늙으면 조직이 강화되기 마련이고 마침내 그 조직은 화석화되어 비인간화의 작업과 더불어 인간의 삶을 잠식해 들어갑니다. 현금 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이 서구사회도 고도로 조직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선진사회라고 하고 이른바 복지 사회라고 해서 부러워합니다. 확실히 편리한 게 사실입니다. 모든 일이 세분화되어 각기 맡은 분야가 뚜렷하기 때문에 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병이 나면 의사에게 가면 되고, 치료비는 보험 회사가 지불하고, 죽으면 병원 영안실에서 곧장 공동묘지로 가면 이미 신부나 목사가 대기해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이 기계와도 같이 처리됩니다. 그러니 곁에서 무슨 사고가 나도 실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제 분야가 아닐 뿐 아니라 처리할 사람이 따로 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불간섭이 최대의 미덕으로 통합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인간은 완전히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되고 정신 세계는 균형을 잃어 도무지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상실해 버린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젠 정말 방향도, 가치관도, 의미도 묻는 이가 없으며, 정의니 진리니 하는 것도 한갓 공허한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령 성전에서 예배하려면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이방에서 온 순례자들은 그런 제물을 가능한 한 성전  가까이에서 살 수 밖에 없고, 그러려면 우선 외국돈을 유대돈으로 환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전 당국은 아예 성전 안에다 양과 비둘기파는 가게를 마련하고 환전소도 설치해서 예배자들에게도 편리를 제공하고 또 거기서 생기는 이윤으로 성전 유지비도 조달하면 피차가 좋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논리에서 보면 그 어느 것 하나도 다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기존질서란 이와 같은 구조적인 연쇄성을 가졌기 때문에 부분 부분을 따져 보면 다 필연적인 것뿐입니다. 그리고 개개인은 모두가 그러한 연쇄구조 속의 일익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운운할 눈도 권리도 가질 겨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는 성전이 무엇이냐? 인간다운 삶이 무엇이냐를 물을 사람도 없고, 성전이 시장판으로 둔갑하고, 독재와 착취와 온갖 부조리가 난무해도 아무런 반성도 없이 살아갑니다.
 자, 이쯤에서 우리는 이제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정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누가 과연 그것을 문책하고 그것들과 대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자란 우선 기존질서에 아무런 자리도 갖지 않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존질서가 인정하는 권위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공자는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세상에 도가 있으면 나가 활동하고 도가 없으면 숨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군자의 처세입니다. 즉 그것은 기존질서를 전제하고 그 범위 애에서만 행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도는 저절로 생기는 가를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 세상 속에서는 그 어떤 지위도 없었기에 항거하실 수 있었고, 또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현실에 저항하여 일어나셨기 때문에 실은 기존사회 전체의 향방을 물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역사도 분명히 잘못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럼
에도 현 질서에 지위를 가진 자들은 그것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무명의 학생들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정치나 사회 문제에는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눈이 뒤집혀 역사나 민족을 위기로 내몰았다면 이제 그들 스스로의 힘에 어떤 처방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어떤 새로운 권위를 노려서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면서도 새로운 권위에 대해 아무런 야심을 가지시지 않았던 것은 우선 권위에 대해 진정으로 자유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다시 지상에는 그 어떤 권위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나는 사심 없는 혁명, 현 질서의 참된 변혁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정신을 따를 때만이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 작은 반도의 한 많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모진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잇는 자들은 분명 권외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국에 직면한 현실에 대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외치지 못하고 그것은 내 할 일이 아니라고 돌아선다면 그 나라 그 사회는 망하는 도리밖에 더 없을 것입니다.
 「무슨 권위로!」 라며 대드는 기득권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비장한 각오로써 이 싸움에 나설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