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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1일 수요성경공부 히브리서 강해 43
본문: 히 13:20-25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히브리서의 마지막 당부와 인사말입니다. 20절 하반절 “평강의 하나님이”, 21절 하반절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합니다. 무엇을 이루시는 겁니까? 21절입니다.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어떻게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루려고 하시는 것은 우리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수족들입니다. 하나님은 머리이십니다. 그래서 수족인 우리를 통해 머리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서를 마감하며 우리에게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뜻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수족, 예수 그리스도의 수족으로서 충실하라는 겁니다. 주님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지극히 자기를 낮춰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렇게 33년을 사시고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기를 피땀을 흘리며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자기를 복종시켰습니다. 주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대로 살다가 이 땅을 떠난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삽니다. 우리는 항상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꺾으려고 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어떻게든 꺾으려는 게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피땀을 흘리면서 자기 뜻을 꺾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생애였고 최후기도였습니다. 우리 뜻대로 살면 우리는 망합니다. 우리 뜻은 다 고약한 겁니다. 우리를 위하는 게 아니고 다 우리를 해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는 겁니다. 오히려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싸움 그만하시고 이제는 내 뜻을 꺾읍시다. 하나님의 뜻에 매진합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다음은 권면의 말씀을 용납하는 겁니다. 2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용납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자기가 쓴 히브리서를 수용하라는 말입니다. 아멘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하며 용납하는 듯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원색적으로 반발하지는 않지만 항상 저변에 말씀에 대한 반항심이 있습니다. 말씀에 절대적으로 아멘 하는 태도보다는 회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가 말씀을 전적으로 용납하지 못할까요? 말씀은 내 기호, 정서, 가치관, 바람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철저히 내 기호와는 반대로 갑니다. 나는 돈을 원하는데, 성경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나는 높아지고 싶은데 성경은 자신을 낮추라고 합니다. 나는 주일날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가고 싶은데 주일을 성수하라고 합니다. 돈 없는데 십일조를 하라고 합니다. 피곤한데 헌신하라고 합니다. 나는 세상과 어울리며 즐기고 싶은데 성경은 구별된 삶을 살라고 합니다. 성경은 철저히 내 기호와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때문에 억지로 아멘이지만, 항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경 말씀이 내게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끔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들을 때, 정말 용납되지 않습니다. 설교하는 분의 언어가 거칠고, 예화가 참 그렇습니다. 그러면 절대 은혜가 안 됩니다. 그런데 똑같은 강사가 설교하는데도 어떤 분들은 아멘 아멘 하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 말씀이 진심으로 용납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은혜가 안 되지만 그 분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용납이 안 되면 은혜가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 받으러 교회 왔다가 피 흘리며 돌아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내가 너희에게 하는 권면’을 용납하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수용하시고 진심으로 아멘 하십시오.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이루라고 합니다. 마지막 25절입니다.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그런데 이 말씀의 원어적인 뜻은 은혜를 쏟지 말라는 겁니다. 받은 은혜를 상실하지 말라는 겁니다. 은혜를 고갈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곧 은혜 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는 그야말로 선물인데 이것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관리가 안 되면 은혜는 소멸되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는 내가 노력하거나 투자해서 얻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다음은 내 몫입니다.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하면 본인도 잘 알고 남도 잘 압니다. 은혜 생활하는 분은 우선 분위기가 다릅니다. 얼굴 빛, 언어, 몸짓이 다릅니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은혜가 없으면 그렇게 매말라 보일 수 없고, 피곤하게 보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억지로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에 붙잡혀 해야 합니다. 어떻게 은혜 없이 성경보고, 예배보고, 헌금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은혜로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떠나면 결국 신앙생활도 떠나고, 교회도 떠나게 됩니다. 은혜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 충만하면 어떤 사역도 너끈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돌아보십시오. 자신에게 은혜가 있는지, 고갈되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신앙생활이 고단하고 피곤하면 은혜를 많이 까먹은 겁니다. 은혜 생활은 필수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를 마감하며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받은 은혜를 잘 관리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은혜와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