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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3일 수요성경공부 히브리서 강해 39
본문: 히 12:14-17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16절 하반절과 17절 입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에는 에서가 나옵니다. 대표적인 낙오자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뱃속에서 이미 싸웠습니다. 태어날 때도 에서가 먼저 나오자, 야곱이 뒤따라 나오면서 에서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앞으로 있을 치열한 싸움의 상징입니다. 어쨌든 에서가 먼저 나와 장자가 되었습니다. 재산보다 장자의 복은 무엇이냐면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약속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약속은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을 주겠고,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아버지 이삭과 장자 에서를 통해 그 가문에 준 유업이자 복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어려서부터 이삭에게서 이 말씀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승계되어온 복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이 이 축복의 약속과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남인 형 에서의 몫이라고 본 겁니다. 이때부터 야곱이 체념한 게 아니고 흑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이 야곱은 장자권을 소중하게 생각한 겁니다. 장자권을 하찮게 생각지 않고 굉장한 특권으로 생각한 겁니다. 야곱은 반드시 형의 장자권을 빼앗아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복을 자신이 승계하리라고 마음 먹은 겁니다. 야곱의 발상 자체가 너무도 놀랍지 않습니까? 장자가 되지 못한 것을 비관할 수는 있어도 어떻게 형의 장자권을 가로 채려고 할 수 있습니까? 장남이 되어야 하나님의 유업을 계승할 주자가 된다는 것이 야곱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역할과 신분, 지위를 야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하게 생각한 겁니다. 야곱이야말로 장자직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에서가 사냥하고 돌아와 기진해 있는데, 팥죽을 쑤던 야곱에게 형이 팥죽 한 그릇 달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뜸 형의 장자의 권한을 내게 달라고 합니다. 창세기 25장 32절을 보면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합니다. 에서는 맹세까지 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긴 겁니다. 그때 야곱이 비로소 장자권을 넘겨받는 대가로 팥죽 한 그릇을 줍니다.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야곱은 자기의 목숨을 걸만큼 장자권을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에서는 내가 지금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장자권이 무슨 유익이 있냐면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직을 팔만큼 그 직을 하찮게 여깁니다. 그래서 창세기 25장 34절 하반절을 보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고 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시고 파격적으로 차남인 야곱을 택하십니다. 원래는 에서의 하나님인데, 야곱의 하나님이 된 겁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버린 겁니다. 에서의 자리에 야곱을 앉힌 겁니다.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통해 당신의 축복과 경륜을 전승하신 겁니다. 굳이 귀하게 여기지도 않는데 에서를 장자직에 두실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장자권을 원했던 야곱을 장자로 삼은 겁니다. 이런 파격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물론 여기에 윤리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인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단은 중요치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말인가?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목적만 선하면 하나님이 그 과정과 수단을 다 눈감아 주시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서의 이야기에서 이 문제가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헌금을 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기를 칠 수 있는가? 성경을 읽기 위해서 촛불을 훔쳐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장자직이라면 얼마든지 형을 기만해도 되는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이 에서를 버리셨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분인가? 하는 겁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목적이 고상하다고 해서 잘못된 수단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목적이 고상한 만큼 그 과정이나 방법도 고상해야 한다고 합니다. 헌금을 못하는 한이 있어도 도적질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목적보다 그 과정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목적을 이루지 못해도 과정이 경건하고 좋으면 치하 받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었다해도 그 과정이 틀렸으면 틀린 겁니다.

그러면 인륜을 짓밟은 이 야곱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장자권을 얻고자 하는 야곱의 살인적인 집념이 가능케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승계하는 장자의 축복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무색케 합니다. 하나님이 용납하신 겁니다. 과정과 수단을 망가뜨려 내가 저주 받는다 해도 이 장자권을 얻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장자권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죽일테면 죽이라고 붙잡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장자권을 향한 그 무서운 목적이 모든 수단을 상대화시키고, 이를 하나님이 감복하신 겁니다. 에서는 장자권에 대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보장된 장자권마저도 결국 빼앗기도 만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승계 받을 수 있는 장자직에 대한 생각이 없었으면 팥죽 한 그릇에 팔 수 있습니까? 에서의 장자권에 대한 인식이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장자들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우리가 장자의 지위를 가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승계하는 권한을 받은 겁니다. 그러므로 이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장자권을 목숨을 걸고 지키면 야곱의 복을 받는 것이고, 하찮게 여기면 에서처럼 저주 받는 겁니다. 배고프다고 장자권을 팔지 마십시오. 우리는 순간순간 죽 한 그릇에 우리의 신분 곧 하나님의 자녀됨과 하나님의 유업을 승계하는 장자권을 우습게 팝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장자권을 잘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위를 잘 지킵시다. 어떤 경우에도 이것을 팔지 마십시다. 허무한 죽에 팔지 마십시오. 한심한 데에 내 신분을 팔지 마십시오. 에서처럼 하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창세기 27장 18-19절입니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야곱이 에서로 가장하고 에서에게 내릴 최후의 축도를 훔치는 대목입니다. 정말 야곱은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자기가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권을 샀으니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축도를 자기가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야곱은 ‘네가 누구냐?’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버지가 장자에게 하는 최후의 축복기도를 통해 복이 승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축도가 중요한 겁니다. 예배 마지막에 축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축도는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축도하는 시간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위해 한 주 동안 기도한 모든 것이 그 때 이루어집니다. 야곱은 이 기도를 탈취하려고 이토록 우스꽝스러운 쇼를 한 겁니다. 형의 장자권은 팥죽 한 그릇으로, 아버지는 염소 고기로 속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축복만큼은 강도짓을 해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게 모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결함을 상대화한 겁니다.

우리의 궁극 가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만일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살인해야 한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았을 겁니다. 야곱은 극단적으로 저주까지도 감수합니다. 창세기 27장 12절을 보면 야곱이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야곱도 한 순간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없었던 겁니다. 이점을 하나님이 높이 사신 겁니다. 이런 야곱 앞에서는 윤리도 도덕도 다 무색해진 겁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과 그 축복을 승계 받는 것을 이토록 귀하게 생각한 겁니다. 허무하게 자신의 신분을 판 에서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에 죽기를 각오한 야곱을 생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