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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0일 수요성경공부 히브리서 강해 37
본문: 히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지난 시간으로 명예의 전당이요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을 끝냈습니다. 오늘은 12장입니다. 1절입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은 바로 앞장인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그들이 증언하는 것은 믿음의 위대함, 믿음으로 사는 삶의 소중함입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듣고 용기를 얻어 우리 믿음의 경주에서 성공을 이뤄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는 그 구조가 비슷합니다. 지금 유럽은 헬레니즘 문화권이었습니다. 많이 변하긴 했으나 지금도 중세풍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오래 된 도시일수록 그 도시의 구조가 비슷합니다. 도시 가운데는 아고라 광장이 있고, 그 광장의 동쪽에는 체육시설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남쪽에는 관청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아고라에서 토론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켰고, 운동시설에서 체력을 연마하고, 도서관에서 정신을 성숙하게 했습니다. 헬라문화권에서 민주주의가 태동하고, 올림픽이 발생되고, 철학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헬라문화에서 태어나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는 율법도 배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을 보면 신앙생활을 뜀박질에 비유합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나는 도상의 존재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라는 겁니다. 이게 다 헬레니즘 전통의 뜀박질에서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하반절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신앙생활을 달음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뜀박질로 비유된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절 중반절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육상선수는 다 벗고 팬티하나만 걸쳐야 합니다. 요즘은 선수들의 신발도 최첨단 소재로 만들어 가볍게 한다고 합니다. 육상선수들뿐만 아니라 체급 선수들도 다 벗어야 합니다. 권투 선수를 보십시오. 꼭 필요한 것만 남기도 다 벗어야 합니다. 이것이 승부를 결정짓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여기서 내 몸을 친다는 것은 자학이나 자해가 아닙니다. 인간적 미련과 애착을 과감히 다 잘라내라는 겁니다. 이런 것에 붙잡혀 있으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직도 무거운 짐을 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발전이 없습니다. 내가 벗어야할 짐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십시오. 다 잘라내야 낙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내를 주문합니다(1). 인내는 절대적인 덕목입니다. 장거리 경주는 인내심의 대결입니다. 뼈를 깎는 극기와 자제와 인내 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배우는 것은 더도 말고 인내입니다. 요즘 많은 이들이 신앙을 버리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생활이란 장거리 달리기와 같은 것이어서 인내심이 필요한데, 요즘은 인내심이 없습니다. 작은 불편, 작은 고통을 참지 못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조급하고 경박해졌습니다. 기도하자마자 하나님이 당장에 응답해 주셔야 하고, 보여주십시오 하면 당장에 뭔가 보여야 하고, 낫게 해주십시오 하면 당장 나아야 합니다. 3절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주님의 참으심을 생각하며 너희의 피곤과 낙심을 인내하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분명 믿음의 경주인데도 낙심도 된다는 겁니다. 거저 되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도 결국 인내와의 싸움입니다. 본문 2절 하반절입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은 십자가까지 참으신 인내의 화신입니다. 요즘 우리가 교회를 뛰쳐나가는 것도 십자가를 못 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대해 인내할 자신이 없는 겁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마침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부끄러움, 죄인들의 거역을 인내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끝까지 참고 뛰십시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다 그렇게 했습니다.

또한 ‘목표를 바란다’고 합니다. 2절 상반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빌립보서 3장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고린도전서 9장 26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우리도 정확히 주님을 정조준 해야 합니다. 뛰다 말고 엉뚱한 곳으로 새면 실패합니다. 목표를 정확히 겨냥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마라톤은 42.195km입니다. 이 최종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뛰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 이하입니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의 최후고백입니다. 올림픽이나 다른 경기에서는 메달을 따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왜냐면 세상이 주는 것은 아무리 영예로워도 썩을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면류관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영생의 경주에서 우리 중 누구도 낙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처럼 최후의 승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