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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사용하는 전통적인 용어 가운데 <보혈의 공로>라는 게 있습니다. 주님이 험악한 처형대인 십자가에 달려 쏟으신 피로 우리가 대신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고백을 함축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면서 그 본래의 생생하던 현실감을 많이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째서 2천 년 전에 있었던 주님의 죽음이 이 시대의 나를 대신한 죽음이 된다는 것인지, 주님이 십자가 형틀에서 흘리신 피가 어째서 내게 구원의 은혜가 된다는 것인지가 선뜻 피부에 와 닿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게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가 풀어야 할 근본적인 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평소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배신하지 않을 거라며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위기가 닥치자 내부 밀고자가 생겼고, 모두 제 살 길을 찾아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치기에 바빴습니다. 주님 신변에 닥친 위기의 불똥이 혹 자신들에게로 튈까 꼭꼭 숨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주님은 홀로 십자가에 달려 고통하시다 운명하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주님의 그런 고독한 죽음이 제자들의 그 못난 꼴을 적나라하게 다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철석같이 약속했던 신의를 저버렸고, 끝가지 부여잡겠다던 믿음의 지팡이를 꺾었으며, 주님이야 어찌되건 저 혼자만의 안전을 지키겠다며 모두가 배신의 길로 달음질쳤습니다. 


수제자라던 베드로마저도 거푸 주님을 부인하며 저주했으니 당시 그들 가운데서 멀쩡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만약 여기에서 끝나고 말았다면 제자들도 아마 평생 회한의 가슴을 쓸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그들의 입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고백이 터져나왔습니다. 

<죽기는  죄 없으신 주님이 죽으셨는데 도리어 죄 많은 우리가 살았도다. 세상의 모든 비방과 죄를 그분이 다 뒤집어쓰고 돌아가시므로 아, 우리가 당해야 할 저주와 분노를 그분이 홀로 당하셨도다. 그분이 흘리신 보혈 덕분에 이제 우리가 이렇게 살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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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까닭입니다. 

<죄에 대한 징벌은 내가 다 당했으니 너희는 이제 더 이상 가슴 칠 일이 없다>하시며 보듬어주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자칫 사랑을 배반한 죄인으로 영영 끝나버릴 인생들이었는데 아무런 정죄도 없이 도리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 유명한 바울의 보혈의 공로에 대한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도다!>(롬 6장). 

징벌대신 새 출발의 은혜를 입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순전한 <보혈의 공로>라는 것입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일깨운다>는 T. S. 엘리엇의 <가장 잔인한 달> 4월,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4.15 총선까지 너끈히 치러내고 오늘은 다시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 60돌과 겹치는 주일을 맞았습니다. 


부디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기리는 뜨거운 감격이 솟아나길 빕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가 더 이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주저앉지 않고 제자들처럼 다시 부활의 생기로 가득 차 새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잔인한 4월이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