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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시다시피 기독교는 참 보잘 것 없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주님도 당시의 사회적 비중으로 볼 때는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복음서만 보면 그 출발부터가 우주적인 듯하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온 유대 사회의 관심의 초점이 된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에 교회가 선 뒤 기록된 복음서에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윤색된 결과일 뿐 실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활동 무대를 보십시오. 유대 사회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니고 정통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맨 쌍놈들만 웅거하던 저 오지 변방 갈릴리였습니다. 또 주님이 주로 상대한 사람들 역시 온갖 환자들로부터 창녀, 세리, 과부 등 오합지졸에 지지리 궁상이었습니다. 종당에는 주님이 식민지 반란범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형인 십자가에 처해지지만 사실은 왜 그런 극형을 받아야 했는지 그 죄목조차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자라는 사람들도 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동안에는 전혀 이렇다 할 특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막판에 그들이 스승을 버리고 모두 줄행랑을 쳤다는 것은 그들 본래의 꼴을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가사의한 것은 그렇게 무능하고 한심하고 무책임했던 사람들이 후에는 어떻게 그토록 무서운 투지를 불사르며 유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혹독한 박해를 견디고, 마침내는 유대의 경계를 넘어 가는 곳마다 복음의 불길을 당기며 결국 로마의 심장에까지 돌진하여 이번에는 도리어 그들을 복음으로 굴복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겁니다. 


더욱 경악할 사실은 바울 같은 이가 그들의 신앙에 투항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학적 고찰이나 심리학적 분석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그로 말하면 기독교로 전향하기 전부터 이미 당대의 탁월한 지성이자 백전불굴의 유대교 전사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자신에 비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작은 무리의 신앙에 굴복하여 그때까지 쌓아온 자기의 모든 인생 경력과 스펙을 마치 <오줌이나 똥>(빌 3:8) 같이 내버리는 자기 변혁이 가능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게 다 주님의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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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예상치 못한 <코로나19>가 전 지구인들을 큰 시험에 빠뜨렸습니다. 

마치 인류가 이 보이지 않는 공동의 적 앞에서 얼마나 서로의 고통을 공감하며 잘 이겨내고 있는지를 예의 주시하고 있기라도 한 듯합니다. 자가 격리로 집안에 유폐되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두가 고립된 중에도 다시 마스크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요즘 저는 사람들의 표정이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마스크에 가려 도무지 사람들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마저도 마스크를 끼고 드려야 하니 맨 얼굴이 그립다는 말도 과장은 아닙니다. 정말이지 이 마스크 시대가 빨리 지나가 그게 비록 업무용 표정이고 영혼 없는 웃음일지라도 그냥 사람들의 맨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잔뜩 날이 서 서로를 경계하고, 가족들끼리도 더 건조하고 까칠해진 이 코로나 시대, 그래도 부활절만큼은 꼭 마스크를 벗고 맞기를 바랬는데 올해는 틀렸습니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는 두되 마음의 거리는 더 좁혀야 하고, 얼굴에는 마스크를 하되 영혼은 온전히 드러낸 채로 부활절을 맞을 일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혈관 속에 오늘 새벽 부활하신 주님의 보혈이 유유히 흐르고, 사랑의 백신처럼 그게 열심히 우리 안에서 <코로나19> 항체도 만들고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부활신앙은 한마디로 무덤 속에서도 체념하거나 절망할 수 없다는 생의 모진 절규입니다. 모쪼록 육중한 무덤의 돌문을 열 듯 <코로나19>로 얼어붙은 이 땅에   오늘 밝고 눈부신 부활의 새 생명이 충천하기를 진심으로 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