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속에 묘사된 하나님 상은 슬퍼하고 사랑하고 진노하고 후회하는 참 변화무쌍한 신이십니다. 사실 이런 신의 모습은 동양적인 신관에서 보면 매우 저속한 것입니다. 하늘은 자고로 초연해야 합니다. 인간의 슬픔이나 기쁨, 패배나 승리 따위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이미 신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끝끝내 신비에 싸여 있는 것이 바로 동양의 신입니다. 인간이 도통한다는 것도 바로 그런 신과 같은 초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서의 하나님은 여간 범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성서는 하나님의 그 범속성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게 곧 인간과 더불어 산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엄마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품어주고, 울면 달래고, 끝끝내 고집을 부리면 그냥 내버려두거나 때려주고, 그러다가 다시 끌어안는 엄마! 그것은 어린 자식을 중심으로 사는 엄마여서 그렇습니다. 엄마가 변덕스럽다면 그것은 어린 자식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오는 변덕입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은 그런 하나님이 아예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순수 인간이 되신 초월자라는 것입니다. 한 번은 그분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다 시장하고 목이 말라 야곱의 우물가에 걸터앉으셨습니다. 분명 초월자였으나 배고픈 줄도 알았고, 피곤하고 목마른 줄도 아셨던 너무도 인간적인 초월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때마침 물 길러 나온 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며 <네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네가 도리어 그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고, 그가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게 물을 구걸하고 있는 나그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렇게 유한 속에서 무한을,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를 만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내 앞에 내민 구걸의 손을 외면하고 초월자를 찾는 것은 구도가 아니라 도리어 그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내 편의 신이!>
스스로 무신론자,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어느 시인의 고백입니다. 그는 허무주의를 공언함에도 자기의 소원에 대해 그렇게도 분명할 수가 없습니다. 내 편이 되어 달라는 것은 이미 자기의 욕구가 그만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독거미와도 같은 에고이스트입니다. 지금 나와 마주선 이웃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소경이 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먼 데서 찾지 마십시오. 지금 내게 물 좀 달라하는 나그네에게서 새롭게 성탄하실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은 올해도 가장 낮은 자리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구걸하는 나그네 행색으로 오셔서 <내게 물 좀 달라!>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