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09 21:43

다시 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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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야 한다

요 3:1-12

조성노
1993. 4. 8. 총회 사회부 [교회와 사회]

 

본문은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내용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에피소우드라기 보다 당시의 유대교와 새로운 기치를 들고 일어난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라고 보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는 본문의 두 화자(話者)가 단수로 시작했다가 복수로 바뀐데서도 암시되고 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 체면 때문일 수도 있고 정말 진지한 대화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가 무명의 한 청년인 예수를 찾았다는 것은 그 안에 어떤 동요 혹은 절실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직접적인 질문은 없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에 미루어 볼 때 어떻게 하면 새 세계, 새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였던 것 같다.

니고데모는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일원이었다. 비록 로마의 식민통치로 그 권한이 일부 제한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그는 종교와 전통 수호에 최고의 처결권을 가진 세도가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국회의원 격이었다. 또한 그는 바리새파였다. 바리새파는 집권 세력과 손잡고 국민의 정신 지도를 담당한 일당으로 예수 당시에는 약 6천여명의 성원을 가졌던 특권층이었다. 또한 예수가 니고데모를 향해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라고 한데서 관사를 붙인 것을 보면 그가 저명한 종교지도자였음도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기존질서에 든든히 자리잡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새 것이 온다는 사실을 두려워 할 위치에 있다. 특히 바리새파는 현실주의를 표방했고 현 질서를 공고히 하기에 주력함으로써 종말 사상 따위는 사실상 배격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즉 다시 나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니고데모에게는 ‘너 따위는 희망이 없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하여간 이것은 충격받은 자의 반문이며 항의 혹은 푸념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말이다.

예수는 다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물로 씻듯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 생명을 받지 않고서는 새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예수의 말씀은 여간 엄격하지 않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이것은 점진적인 개선이 아니라 철저한 삶의 혁명을 뜻한다. 이는 다시 난 새로운 존재(New Being)로서만 미래의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질서와 가치관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용인될 수 없었기에 니고데모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역사가 전혀 새로운 전환기에 서 있음을 예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낡은 나를 그대로 지니고서는 급격히 변화되는 새 시대에 결코 적응할 수 없다. 초스피드의 궤도에 낡은 차를 내맡긴다면 그대로 와해되는 결과 밖에는 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혁명을 해야 한다. 이것을 성서는 회개라고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윤리나 도덕의 범주에서 잘못을 시정한다는 따위의 개념이 아니라 근본적인 삶의 방향전환을 뜻한다. 생활양식을 달리한다고 해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회혁명에 앞서 있어야 할 것은 인간혁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홀로 종교적인, 윤리적인 내적 결단을 해도 미 사회조직 속에 휘말려 돌변 그러한 결단이 너무도 무력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는 데 바로 오늘날의 디고데모의 고민이 있다. 왜 그런가.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얻은 것, 얻은 자리를 절대 고수하려 함으로써 그것의 노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새로운 존재가 되려면 ‘현재’라는 기존질서로부터의 소외란 불가피하며 그와 더불어 나의 온갖 기득권이 박탈된다. 이같은 기로에서 결국 ‘다시 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주저 앉고 마는 것이 오늘의 니고데모들이다.

가난한 자를 돕고 약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새로운 존재임을 알면서도 자기의 생활양식은 여전히 이 세태를 모방 경쟁하면서 팽창일로를 달리고 있는데 무슨 여유로 형제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참 새로운 존재란 ‘현재’에서 해방될 때만 가능하다. 현재에서 해방된 자란 도래하는 새 세계에 닻줄을 던진 자이다.

그것이 바로 거듭나는 일이다. 새로운 세계가 오고 있다. 새 세계란 차안에서 피안에로의 이동이 아니라 바로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세계다. 예수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원함이 아니옵고 오직 약한 자에게서 그들을 건져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옵니다’(요 17:15)고 했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존재의 수난의 이유와 과제가 있다. 새로운 존재란 어떤 정적(靜的) 실존이 아니라 악과 더불어 싸우는 데서 얻어지는 존재 양식이다. 이 시대 이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온 몸으로 거부하는 삶의 양태를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