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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에 대한 신학적 소고

조성노
in: 교육교회, 91년 11월, pp.9-15

1. 여는 말

인간은 일하는 동물이다. 일은 인간의 삶의 조건이다. 그런데 인간은 일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일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동물에게도 일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꿀벌이나 개미의 일은 수천년이 지나도 그 방법과 양식에 있어서 변함이 없다. 오직 인간 만이 사유를 통해 일을 변화시켜 왔으며 발전시켜 왔다.
인간의 삶에도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른 것이냐 하는 물음이 있듯이, 일에 있어서도 왜 일을 해야하며, 어떤 정신과 태도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윤리적인 물음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은 과연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인가, 일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아니면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인가, 일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아니면 고통만을 안겨다 줄 뿐인가, 일에는 정말 귀천이 없으며 모든 일은 다 성스러운 것인가 하는 신학적인 물음도 있다. 결국 이러한 여러 가지 윤리적인 혹은 신학적인 이해들이 일에 대한 태도와 인식들을 좌우하면서 인류 역사와 문명을 서로 상이하게 형성하는 주요 요인이 되어 왔다. 다시 말하면 일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윤리적 태도가 곧 인간의 운명과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는 관건이 되어왔다는 얘기다.

2. 일의 긍정성과 부정성

일과 삶의 질은 원시인들에게서나 오늘날에 와서나 깊은 함수관계를 가진다. 일을 부지런히 하는 사람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미래를 위해 축적할 수도 있겠지만, 일을 싫어하고 게으른 사람은 삶이 고통스럽고 불안하며 결국은 남에게 부담을 지우는 짐스러운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일은 본래부터 인간의 삶을 보람되고 풍부하게 만드는 원천으로 이해되어 왔고, 도덕적으로도 높이 평가되어 온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왜 반드시 일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모두가 자명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에는 고통과 괴로움이 따르지만, 또한 즐거움과 충족감도 주어진다. 인간은 일을 통해 소외되기도 하고 예속되기도 하지만, 또한 일에 의해 자유로워지고 해방되기도 한다. 일은 강요에 못이겨서 해야 하는 것이면서 또한 자의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일을 통해 착취당하고 가난해지기도 하지만 또 일에 의해 재산을 모으고 풍요와 행복을 누리게도 된다. 이게 바로 일이 가진 긍정성과 부정성이다. 구약성서는 일의 이러한 양면성을 한편으로는 축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형벌로 성격화하고 있다.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위해 엿새동안 일하셨음을 말함으로써 노동의 신성함을 시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셨다는 사실을 대비시킴으로써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노동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하나님은 에덴을 조성하시고 인간을 살게 하시면서 그 동산을 잘 가꾸고 보존하라고 명하시기도 했다. 이는 곧 일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이요 명령이며 축복이라는 이해다.
그러나 창세기는 일의 또 다른 측면, 즉 부정성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범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아 고된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죄에 대한 저주 때문에 인간이 일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된 것이라기 보다는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었던 고대 농경사회의 인간현실에 대한, 즉 일의 숙명성에 대한 야휘스트들의 독특한 종교적 해석일 것인데, 어쨌거나 그것이 축복이든 형벌이든 간에 구약성서는 인간의 일이란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라는 사상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신약성서 역시도 이러한 전통에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도 바울같은 이도 모두 노동하며 살았고, 특히 바울의 일에 관한 많은 교훈 가운데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극단한 경고도 있을 정도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일의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일을 고통과 괴로움과 희생으로만 보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이해일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일이란 의무여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고, 실현하며, 또한 사회적인 업적과 인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는 일은 기쁨이요, 보람이며, 자기실현의 수단일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뜻있는 봉사가 된다. 그럼에도 실은 일이 가진 이러한 적극적인 측면이 고대나 중세의 노예적 노동의 상황에서는 잘 드러나지 못했다.
그래서 일이 자기실현이요 보람과 업적이 된다는 생각은 수공업자나 상공업가들이 재산과 부를 얻게 되는 근세 시민사회에 와서야 비로소 각성되기 시작했다. 고된 노역을 하는 노예나 농민층과 일하지 않고 여유와 놀이와 정신적 활동을 즐기는 봉건제후나 귀족층이 갈라져 있던 신분사회에서는 결코 일이 행복이나 보람의 원천으로 인식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귀족층이나 유한층들이 누리는 풍요와 행복과 기쁨은 단지 하나님이 선택해준 축복된 계층과 신분 때문이었을 뿐, 그들의 활동이나 일의 댓가는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5, 16 세기에 이르면서 일부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교역의 증대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중세의 신분사회가 무너지면서 갑자기 일과 노동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게 되었다. 인간에게 행복과 풍요를 보장하는 것은 신분이나 계층이 아니라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일의 주종을 이루던 농업과 목축업, 어업이 공업과 상업과 무역업 등으로 바뀌고, 일의 댓가와 보람이 일의 양과 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면서 일에 대한 관념과 가치도 엄청난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많이 생산하고, 많이 판매하는 사람이, 다시 말하면 일을 많이 한 자가 보람과 행복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소명으로서의 일

서구에서의 일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하는 데 결정적인 전기가 이룩된 것은 종교개혁을 통해서 였다. 루터(M. Luther)는 일을 곧 하나님의 소명(召命)과 관련지음으로써 일의 가치와 의미를 크게 고양시켰는데, 중세 때만 해도 소명(vocatio)이란 사제들에게나 가당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를 영적인 소명(vocatio spiritalis)과 세상에서의 소명(vocatio externa)으로 나누고 양자 모두를 신과 인간을 위한 봉사요 소명이라고 새롭게 의미부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루터의 소명관이 칼빈(J. Calvin)에게 이르면 한층 더 강하게 직업윤리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구원받는 자들은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부지런히 저축하는 데서 그 소명과 구원의 징표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개혁교회는 모든 이들이 특정한 직분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아 그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신념에 어느 개신교회 보다도 투철했다. 따라서 이러한 소명의식에 정초한 개혁교회의 직업윤리는 돈과 권력과 명예와 같은 세속적 가치를 그 보상으로 기대하는 직업윤리가 아닌 종교적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근면, 성실, 정직, 검약 등을 직업활동의 신조로 삼을 수 있었고, 또 막스 베버(M. Weber)의 지적처럼 이러한 프로테스탄티즘 정신이 바로 서구 자본주의를 일으킨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청교도 정신이라는 것도 그 밑바탕에는 철저한 소명의식으로서의 직업관이 깔려 있으며, 서구 자본주의가 약육강식의 자유시장 생리의 모순을 극복하고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투철한 소명의식으로써 돈과 명예와 권력 그 자체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깨끗한 직업정신을 발현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서구 사회는 노동자들의 일에 관한 태도나 종교적 소명의식이 극도로 저하되고 있다는 비판이 높다. 과거의 그들은 기독교 윤리에 입각해 근면과 성실성으로써 열심히 일하여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오늘날엔 풍요로운 복지 사회 속에서 편안함과 안이함만 찾을 뿐 일의 의미는 느끼지 못해 각종 퇴폐적인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늘어가고 있는 추세며, 이를 두고 서구 문명의 쇠퇴기를 선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4. 일과 쉼

일찍이 일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생각은 무엇보다도 일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쉴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데 있었다. 아무리 일이 보람되고 삶에 중요하다고 해도 일만하고는 살 수 없는 노릇이다. 삶이란 일만으로 될 수는 없으며 일과 휴식이 함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몸은 일을 안해도 건강하지 못하지만, 일만 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없게끔 되어 있다. 적당히 일한 후에는 반드시 쉬어야 노동능력이 회복되어 다시금 일할 의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옛날 노예들의 노동이나 봉건시대의 일은 댓가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휴식이 보장되지 않은 노역이었다. 구약성서의 안식일법이 그토록 철저하고 극단했던 이유도 율법이란 것이 본디 피지배자의 권리였음을 감안해 볼 때 가난한 자와 노예계층의 휴식이 유린되던 고대사회의 노동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안식일 날 예수의 제자들이 남의 밭을 지나다 밀이삭을 잘라 먹은 일이 있었다(막 2:23 이하). 그런데 이를 본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며 시비하고 나섰다. 그들은 시장한 제자들이 남의 밀이삭을 잘라 먹었대서가 아니라 안식일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정죄한다는 것이다. 즉 안식일법을 생존권의 상위에 놓은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안식일법의 근본정신을 왜곡한 것이다. 하나님의 휴식에 그 원초적인 전거를 둔 성서의 안식일법은 본래 땅을 파고 씨를 뿌려 가꾸어 거둬들임으로 생존의 근거를 제공하는 노동자를 쉬게 하는 제도이다(출 20:9; fp 23:3). 그 제도는 노동하는 짐승들 마저도 포함시킬 만큼 철저했던(출 20:10),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정된 사람을 위한 제도였다. 그런데 사람을 위해 세워진 안식일법이 어떻게 사람의 생존권 주장마저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했을까? 그것은 안식일법이 일이라는 현실 위에 세워진 제도임에도 바로 그 현실을 배제해 버리고 정신화하고 지배이데올로기화 함으로써 생기게 된 아이러니다. 노동과 생산을 배제한 안식일이라는 관념은 생존권을 박탈할 뿐 아니라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잠식하여 억압과 비인간화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안식일 제도의 본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법이란 모든 사람이 무조건 7일에 한번씩 쉬라는 제도가 아니라 6일 동안 힘껏 노동한 사람들만 쉬라는 제도이다. 노동하지 않은 자는 쉴 필요도 없고, 쉴 권리도 없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 그들이 바로 쉴 권리와는 상관 없는 계층, 즉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쉬고 있는 계층이다.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성토하고 나선 그들은 사실상 안식일법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임에도 도리어 안식일법의 파수꾼을 자처하며 허기진 자의 생존권을 짓밟았던 것인데, 이는 어느 시대에서나 일과 쉼의 관계를 유린하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보아 좋은 예일 것이다.

5. 닫는 말

인간이 일을 해야하는 것은 단순히 생존의 수단이나 욕구충족을 위한 방편이기 전에 본래적으로 일하도록 창조된 때문이다. 일하지 않고서는 사는 의미조차 느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 것이 인간이 아닐까 싶다.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일하기에 적합한 손이 있고, 사고력과 창조력이 있다. 따라서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섬기는 행위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 사상가들은 일찍부터 일을 신의 형벌로서가 아니라 신에 대한 예배(Gottesdienst)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들은 신에 대한 예배가 인간의 의무이듯이 일 역사도 인간의 당연한 의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찍이 손으로 하는 노동(mnuelle Arbeit)의 신성함을 강조한 이들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사(Benediktiner)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6세기경부터 실천한다. 수도원의 계율(Ordenregel) 속에 복종, 가난, 순결, 그리고 일을 포함시켰다. 그들의 하루 일과 가운데는 명상과 예배와 학습 이외에 꼭 다섯 시간을 신의 형벌이라고 생각하고 육체적인 노동이야말로 노예나 천한 계층의 몫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던 중세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의 윤리의식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이원화하여 서로의 소외시킨 현대 문명에 큰 경고가 되리라 믿는다.
또한 오늘 우리는 일의 의미를 너무 경제적이고도 물질적인 가치에서만 보려는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앞서 말한대로 개신교의 직업윤리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간에 그것은 곧 신의 소명이기 때문에 모든 직업인은 천직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야 그 일도 보람이 있고, 또한 그 노동 자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순수한 의식이 어느새 때가 묻도 색깔이 바래져서 이제 직업이란 한갖 빵을 얻기 위한 수단만으로 전락되어 버렸다.
사실 이 시대는 고기 낚기에 혈안이 된 물질주의에 완전히 빠져있다. 모두가 물질지상주의로만 줄달음치고 있다. 생각해 보라. 고기낚는 일이나 장사나 과학기술, 심지어는 학문 조차도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닐 터인데 그 자체가 아예 목적이 되어버린 현실, 그래서 모두가 참된 목적은 잃어버리고 오로지 수단에만 매달려 허덕이는게 우리네 현실 아닌가?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간에 고기만 낚고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물질지상주의와 싸워야 한다. 사람낚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일진대 그 일을 위해 언제라도 동원될 각오를 해야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의식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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