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09 21:49

인간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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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

조성노
in: 교육교회, 93-97

I

독일 뮌헨에 있을 때 가끔씩 산의 정기가 그리워 알프스 기슭을 찾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흔히 쓰러진 큰 거목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 때는 그저 고사목이거니 하고 예사롭게 보아 넘겼을 뿐이다.
국내에 들어와서도 벌써 몇 차례 산을 다녀왔다. 그런데 국내의 명산에서도 역시 좁은 등산로를 가로막고 쓰러진 거목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 쓰러진 나무들을 볼 때마다 왠지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 뿌리가 얕았거나 바람이 강했거나 새 세대를 위해서 삶의 자리를 양보했을 거란 생각보다는 오히려 자연을 마구잡이로 짓밟는 인간들의 횡포를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길을 가로막아 보겠다고 자기 몸을 육탄 삼아 아예 드러누운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쉴러는 인간이 손대지 않은 자연은 그게 무엇이든 완전무결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땅에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데가 어디 있는가? 설령 사람의 손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은 곳이 있다고 해도 오염된 대기와 물줄기로 인해 이미 모두가 부정을 탔다. 산이 더럽다! 이건 정말 기막힌 얘기다. 산이니, 강이니, 바다니 하는 말은 원래 깨끗함, 신선함, 원시적인 순수함의 대명사가 아닌가? 도회지의 뒷골목이 더럽다면 몰라도 심산유곡이 더러워서 구역질이 나고 욕지기가 끓는다면 그 환경은 이미 볼장 다 본 것이다. 지난해 12월 26일에는 설악산을 갔다. 눈이 허리에까지 차는 산행을 이른 아침부터 밤 9시가 넘도록 계속했으니 나는 완전히 인사불성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너무 갈증이 심해서 대청봉을 지척에 두고부터는 눈을 움켜 먹었는데 글쎄 입안이 온통 쓰레기통이 되어 버리는게 아닌가.

II

대지가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았다는 창세기의 신념은 황당한 신화인가, 아니다! 실로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인간 현실을 꿰뚫어 본 진리다. 더구나 그것이 대기오염이니 환경파괴니 하는 생태학적 문제가 전혀 없던 고대 사회의 예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기만 하다. 이 시대를 내다 본 선견지명이 아니었던가. 산에 정기가 있다고 믿은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은 현명한 데가 없지 않았다. 그래서 언덕 하나도 함부로 깎지 못했고, 조상의 묘도 아무데나 쓰질 못했다. 원래 동양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유리시켜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서 심지어는 천재지변을 당해도 언제나 인간의 사죄를 빌면서 자연의 노를 달랬다. 우리는 이 날 까지도 그런 사고를 단순히 비과학적이라고 나무라기만 해왔다. 물론 그런 표상들 속에는 미신적인 요소가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이 담겨져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의 생태학은 과학적인 고찰을 통해 모든 생물, 무생물들이, 즉 자연 전체가 얼마나 서로 깊은 유기적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잘 밝혀내고 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생존의 요람이다.

III

인간이란 뜻의 히브리 말인 ‘아담’은 흙이라는 말인 ‘아다마’와 같은 어원을 가졌다. 또 실제 창세기의 인간창조 설화도 원래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란 원래 자연의 일부라는 이해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제 편리한대로 해석항 인간과 자연 사이를 오로지 역학적 관계로만 보았기 때문에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알고 함부로 학대해왔고, 인간을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반 자연적 문화를 형성해 오게 된 것이다. 인류는 바야흐로 자연에 가한 무자비한 폭행으로 이제는 도리어 자연으로부터 맹렬한 보복을 되돌려 받는 부메랑의 시대에 돌입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 지구의 수명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치 무한대의 에너지를 보유한 듯이 그저 개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 지구의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야단들이다. 그것은 무슨 거대한 유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인간들의 횡포에 시달려서 이제는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도록 쇠잔해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말 대지도 인종들이 마구 내다버리는 폐물들을 소멸 생성의 역할을 통해 제대로 소화할 수 없게끔 돼버렸다. 요즘 인간들이 배설하는 것들은 대개가 자연물을 섭취하거나 이용하고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질화된 화학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다시금 자연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것들이 태반이다. 사람의 위가 비닐을 소화하지 못하듯이 대지도 플라스틱은 소화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땅에 묻어도 썩지 않기 때문에 대지를 마비시키고, 바다에 버리면 물고기가 죽고 불에 태우면 대기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도대체 처리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계속적으로 생산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의 상술은 철저하게 인간의 욕망이라는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다. 마침내 다수의 군중들도 그들의 장단에 발맞추어 모두가 욕망의 화신이 된다. 그래서 보다 많이, 보다 편리하게, 보다 빠르게, 보다 멋진 것을 손에 넣기에 혈안이다. 따라서 자기의 수입보다는 언제나 소비가 앞질러 가기 때문에 항상 바쁘다. 혹 어떤 사람은 이런 세태에 불응할 자유도 있지 않느냐고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소비가 미덕이 된 판국에 그 장단에 같이 춤추지 않으면 시대의 낙오자가 된다. 또 활자와 전파를 통해 쉬는 시간에까지도 철저하게 욕망을 자극하는 마당에 무슨 놈의 자유가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기의 바쁘게 뛴 노력의 대가를 통틀어 과잉 생산품을 사고 그 결과 이젠 폐기물들이 이 지구를 마비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IV

하나님이 주신 집을 헐어버린 인간. 어떤 벌레의 유충은 어미의 등에 업혀 제 어미를 전부 파먹어서 결국은 거꾸러 뜨린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들이 바로 그렇다. 어머니 대지인 이 지구를 참혹하게 유린해서 사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런데도 제품 공장들이나 원자력 발전소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더 많이 더 빨리 돌아간다. 왜? 그 기계 때문에 망해간다는데도 그것을 정지시킬 재주가 사람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디딘 길을 스스로 멈출 재간을 배우지 못했다. 그 까닭은 오늘의 사회구조가 인간의 욕망이라는 동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란 바로 그 궤도를 탄 괴물이다.
어쨌든 자연은 그 본의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무모한 욕망에 짓눌려 신음한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라고 한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일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오늘의 자연에 대한 횡포가 생의 필수조건 때문만인가?
전쟁을 궁리하는 나라에는 전쟁에 소용되는 필수품이 요구되고, 도락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또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필수품이 요구되게 마련이다. 출발을 기정사실로 하고 불가피를 내세우는 것이 바로 오늘의 광적 논리다.
그러나 성서의 자연관은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자연의 필연으로 보는 다윈 이후의 자연관과 그것을 거점으로 인간사회의 투쟁을 정당화하는 서구적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V

로마서 8:18-26에는 바울의 자연관이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거기서 바울은 지금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고통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파격적인 자연관이다. 들에 핀 한송이 꽃을 보며 우주의 신비를 찬양하는 시인이 있는데 반해, 바울은 그 아름다움 속에서 자연의 슬픔과 비명을 듣는다. 그는 자연이 있어야 할 본연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허무와 사멸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한다. 자연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산출하는 것은 그 본래의 발전과정이 아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참된 미래가 오면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고,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사 55:13)고 한다. 그러니까 성서는 자연의 포악성을 본연의 모습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올 새 세계란 단순히 인간의 도의성의 향상이나 사회구조의 완결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연의 복귀없이 새 세계란 있을 수 없다. 성서가 역사의 궁극적인 희망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는 신음하는 피조물!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비관론적인 자연관만은 아니다. 그는 다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말함으로써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포악성이 인간의 타락 때문이라고 한다면, 자연의 회복 역시도 인간회복과 직결된 것이라는 신념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상이 깃들어 있다. 서구인들은 자연과 역사를 엄격히 구분해서 자연에는 역사가 없고, 역사라면 그저 인간의 역사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구약성서나 바울은 자연을 결코 인간 역사와 유리시키지 않고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자연의 역사화이다. 역사는 단순히 정신사이거나 실존사가 아니다. 역사는 그야말로 우주사다. 보편사(Universalgeschichte)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과 후기 유대교 묵시문학과 바울의 사관이다. 지금도 자연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인간회복을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서가 아니라 관리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때 비로소 자연도 그 본래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궁극적인 구원은 전체적인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인간의 출현을 의미한다. 구원은 결코 이 세계에서의 도피를 뜻하지 않고 바로 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자연과 더불어 이루어질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