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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언어」로서의 신학적 언어의 실체


I. 신학도의 자리

신학도란 참 예사로운 존재다. 생활에 쫓기고 쓰러지다 풀이 꺾이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맹목에 지배되고, 삶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고 머뭇거리는 가장 하찮은 자들 중의 하나다. 다만 그 숱한 삶의 고뇌를 좀 더 오래 응시하고, 그럼으로써 그 시대의 어두움을 명명하도록 강성된 자일 뿐이다. 따라서 신학도는 가장 순수하게 구속당한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그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말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아니라 모두에게 속한 말이다. 신학하는 자가 만일 화를 입는다면 거의가 이 말 때문인데, 그만치 말은 그의 행동이며 사건이며 모든 것이다.
그렇다. 신학도의 말은 공허한 소리의 언어나 단순한 문자의 언어가 아닌 「행동의 언어(Tatwort)」다. 「행동언어」란 본디 헬레니즘의 전통에서는 찾을 수 없는 헤브라이즘의 전통, 즉 구약성서의 전통을 가진 것으로 여기에는 언어가 곧 행동이며 사건이라는 뜻 외에도 언어란 반드시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는 요청의 뜻이 담겨있다(G. von Rad, Die Botschaft der Propheten, München 198, S.28). 창세기에 따르면 야훼께서는 맨처음에 말씀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즉 “빛이 있으라!” 하시니까 실제 빛이 생겨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야훼의 창조적 언어가 다름 아닌 “행동언어”로서의 신학적 언어의 실체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앞뒤를 돌아보지 않는 말이며, 눈치를 보지 않는 말이며, 겁이 없는 말이다. 만약 그의 말이 겁을 먹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그가 이 순수한 구속을 저버린 탓이다. 즉 모두의 삶으로 될 수 없는 개인의 삶을 살려할 때, 모두의 말이 아닌 개인의 말을 하려할 때, 그의 말은 겁을 먹는다. 개인으로 보자면 그는 결코 천재도 영웅도 성인도 아닌 가장 어리석고 가장 겁많은 존재에 불과하니까. 따라서 한 시대의 어두움을 명명하도록 부름 받아 그 순수한 구속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거기에 참된 신학도의 자리가 열린다.


II. 신학의 비신화화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신학이라는 술어에는 이미 그리스도교 신학이라는 인식이 자명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원래 신학(θεολογια)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오히려 비그리스도교적․희랍철학적 유래를 가지고 있다.
신학이라는 말을 최초로 쓴 플라톤(Politeia II 379.a5)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나 헤시오도스(Hesiod)의 경우도 단지 그들의 형이상학을 의미하는 개념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신학에 대한 이해가 적어도 오늘날과 같은 관념으로 정립되기까지는 오랜 갈등의 역사를 겪은 후인 13세기경부터였다.
유럽의 대학들이 법학, 의학 외에도 신학(doctrina sacra)을 하나의 학과로 설치하여 가르친 때부터 비로소 그리스도교 교의 전체를 다루는 학문을 신학이라 명명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신학이 단지 그리스도교 교의 연구에만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상 학문과는 거리가 먼 상황과 관심 때문이었다.
그것은 첫째, 유럽의 대학들이 설립될 당시 막강했던 교권의사회적 위상의 반영이었고, 둘째는 장래의 성직자들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교회의 관심 때문이었으며, 셋째는 그리스도교 신학자가 그 자신의 신앙을 해명하고자 하는 관심으로 인해 결과된 것이다. 그럼에도 교권과 그리스도교 문화가 지배하던 사회 속에서는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학문으로서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도교 진리의 타당성이 과거와 같이 자명하지도 않을뿐더러 또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과도 만나지 않을 수 없는 다원종교의 상황 속에서 타종교들에 대한 그리스도교 진리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무조건 전제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학은 다른 종교들에 대한 배타적 자세를 버리고 연구의 범위를 넓혀 타종교에 대해서도 숙고하는 「종교들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원종교의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그리스도교 진리의 보편 타당성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신학의 본래적인 테마의 포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테마의 탈교파화(Entkonfessionalisierung)를 뜻할 뿐이다. 하나님의 현실은 비단 그리스도교 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의 자리에 주어져 있고, 모든 타종교들 속에도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제 그리스도교 신학은 중세적 개념과 같은 「신학일반」을 뜻할 수 없고 단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에 대한 학문을 의미할 뿐이다. 즉 그리스도교의 전승을 연구하는 「신학일반」의 한 분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 가장 크게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독단론이다. 그 어떤 신학도 하나의 신학(eine Theologie)이지, 신학 그 자체(Die Theologie)는 아니다. 이점에 관한 한은 그리스도교 신학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일반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이나 우위성을 전제할 수 없으며 단지 보편적인 종교 세계에 속한 일부로서 타종교들 속에도 나타나는 신적 현실이 그리스도교에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를 연구해야 할 따름이다. 다양한 종교들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교 역시 다른 종교들과 같이 신적 현실에 대한 인간 경험의 표현으로서의 그 신빙성과 진리를 비판받고 검증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만일 그리스도교 신학이 신앙고백적 입장에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우위성을 전제한 다음 연구된다면 그리스도교 신학은 곧 객관적 타당성과 학문적 상대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신학을 오로지 그리스도교 신학으로만 제한시키는 일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이 서구사회 속에서 공인되던, 그리고 타종교와의 관계가 거의 없던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신학은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그 속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종교들에 대한 그리스도교 계시의 우월성을 객관적 검증 없이 무비판적으로 전제해서는 안될 것이고, 또 비판적인 성찰을 거부해서도 안될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학의 내용이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할 경우 신학의 학문적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바르트와 같이 신앙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학문 곧 신앙의 학문이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앙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학문적인 중립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신학연구의 모든 내용을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또 이 비판적 기능이 날카로울 때 신학은 자기 동일성의 확립뿐 아니라 마침내는 신앙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III. 보편학문으로서의 신학의 동일성

신학은 결코 자체의 경건한 신앙고백의 피안에만 고립될 수 없다. 신학의 학문적 성격과 신학 역시도 타학문과의 보편적인 연관성의 맥락 속에 놓여 있다는 신학 본연의 정체성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사실 계몽주의 사조가 세계를 휩쓴 이래로 신학은 점점 그 고유한 영토를 상실당해 이제는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 가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신학으로 하여금 이성의 지평 위에서 타학문과 떳떳이 만나고 대결하는 보편적 학문이 되게해야 한다. 신학을 하나의 보편적 학문의 기능에로 복귀시켜야 할 과제란 결코 인위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신학 그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신학이라는 것이 정말 「신에 관해 말하는(Rede von Gott)」 학문이라고 한다면 신학에 대한 보편성의 요구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이해는 「만물의 창조자」라는 규정이다. 그렇다면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며 더구나 신학은 모든 존재자들(alles Seiendes)을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련하에서 조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가 된다. 하기야 불트만 같은 사람은 거기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신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곧 인간학이다」고 정의하는데 그것은 그럴듯하다. 바로 이같은 사실이 신학의 보편성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사실 과거 서구 개신교 신학의 과오는 바로 이러한 보편적 학문성의 포기에 있었다.
특히 종교개혁 이래의 개신교 신학은 소위 편협한 성서원리라는 것에 붙잡혀서 성서해석이라는 특수 분야만이 자기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수하려한 나머지 이성에 입각한 다른 일반학문과는 점점 유리되어 마침내 이제는 타학문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신학의 가정 시급한 현실적 과제란 그 주제의 내적 요구에 따라 다시금 신학 본연의 학문적 보편성을 되찾는 일이다. 그리고 이 일에 있어 바르트의 초월주의나 불트만의 지엽주의․주관주의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이 그 본연의 동일성으로서의 학문적 보편성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거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충족 조건은 그대로 우리 신학도들의 필연의 과제가 되어야할 것이다. 첫째, 신학이 학문적 대상으로 삼는 주제가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같이 신학의 대상은 신이다. 그리고 창조자로서의 그 신은 「모든 존재를 결정하는 능력」으로서 이 세계의 일체를 포섭하기에 충분한 보편적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비록 신학의 주제가 가장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신이라고는 해도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에 의하면 그 우주적인 신의 인식에 있어서는 신 자신이 스스로를 계시하는 만큼만 인간이 그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학이 학문적 보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필히 제한적이고도 특수한 이 신의 자기계시 개념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 신학의 텍스트인 하나님의 자기계시 자체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신학의 계시 개념에 비춰 볼 때 계시가 과연 보편적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난감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또한 그것은 실종된 신학의 보편성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감당되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둘째, 신학의 인식론도 역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계시 이해의 방법론인 신학적 인식론이 보편적이지 못하고 특수한 기반위에 있다면 그 신학은 결코 보편학문일 수 없다. 즉 보편적 인식의 매개로서의 이성이 무시되고 「성령의 조명」이나 특수한 「신앙의 지식」 따위가 강조될 때 보편학문으로서의 신학의 동일성은 기대되기 어렵다. 따라서 신학적 인식론에 있어서의 이성의 지위는 지금까지의 홀대로부터 비약적인 격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IV. 신앙과 신학의 역학

바르트를 위시한 변증법적 신학자들에게 있어서의 신학이란 회개와 순종의 행위이며, 기도로만이 수행되는 신앙의 행위이다(KD I/1, S.16ff.). 그러나 우리는 학(logos0을 선포나 고백으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신학은 고백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학이 신앙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선포나 신앙고백이 신학의 근거가 되며 터전이 됨에는 틀림 없지만 그것이 곧 신학일 수는 없다.
신학과 신앙의 연속성을 인정하고, 신학의 신앙에의 참여를 인정한다해도 신앙의 직접 경험에 대한 표현이 그대로 신학일 수는 없다. 이를테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은 신앙의 언표일 뿐 아직 신학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학의 영역에 들지 못한다. 신앙의 직접경험은 단지 신학의 데이터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신학에 있어서는 신앙이 사고에 종속된다. 그리고 사고는 합리성과비판성을 그 본질로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판단이나 명제가 아닌 것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고백의 경우는 심지어 그것의 참(眞)과 거짓(僞)을 물을 수 조차도 없다.
신학적 개념은 무엇 보다도 명석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혼자나 아는 방언이나 불분명한 환상적 언어는 결코 신학적 언어가 될 수 없다. 또한 신학적 진술은 상호 연관성, 즉 학적 체계를 전제로한 논리적 정합성이 있어야 한다. 체계는 학적 진술의 기본조건이며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이 신학일 수 있으려면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합리적 근거를 비판적․객관적으로 밝히고 그것을 일관성있게 체계화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학의 학적 진술의 의미이다.


V. 신앙과 신학의 통전

오늘날 목회가 신학화되지 못하고 신자들의 신앙이 삶으로 이행되지 못하는 분열현상은 모두가 신앙과 신학의 변증법적 통전이 도모되지 못한 탓이다. 신앙은 사적이나 신학은 공적이며, 신앙은 지극히 내밀한 주관적 차원의 고백이나 신학은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학문이다. 신앙은 긍정이며 신뢰이나 신학은 분석이며 비판이고, 신앙은 맹목적인 결단이나 신학은 이성적인 성찰이다. 따라서 신앙과 신학의 관계는 긴장성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양자의 통전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몸(σὤμα)」으로서이다.
몸은 하나며 전체이고, 삶이며 인격이다. 사람이 곧 몸이며 몸이 곧 통째 사람(全人)이다. 따라서 영과 육이 몸으로 일원화되듯, 말씀과 육신이 예수의 삶에서 통전되었듯 몸이야 말로 신학과 신앙의 통전이 실현되는 곳이고, 또 실현되어야 할 장소다. 그러므로 「신학함」이란 궁극적으로는 「신학을 삶」이며, 신학을 산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한 「온 몸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큰 고민도 바로 주․객의 분리 문제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키에르케고르에게서도 그 고민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영과 육의 분열을 종합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 영과 육이 정신이라는 제 3의 장소에서 통전될 때만이 참인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폐단은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례되면서도 그 역사적 정황과 더불어 농후하게 나타났다. 일제하에서 삶의 많은 부분들을 약탈당한 우리 민족은 마침내 삶을 두 갈래로 나누어 놓게 되었다. 종교는 그 중 영적인 면만을 담당하여 언제나 피안적인 것만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역사적 현실에서의 도피였다. 먹고 입고 산다는 엄연한 현실에 매여 있으면서도 마치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듯한 이중적인 삶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내적 갈등과 분열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서의 전인적인 몸 사상은 서구인들 보다도 오히려 동양인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서구의 오랜 전통은 사유(Denken)로써 모든 것을 파악하는 과학(Wissenschaft)적 이해인데 반해 동양은 본디 몸으로 모든 것을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전체로서 파악하는 직관적인 각(覺, Weisheit)의 전통이다. 따라서 서구인들은 사유로써 명상하고 기도하고 복종하는데 반해 동양인들은 몸으로 명상하고 복종한다. 물론 서구에도 「몸으로」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나 중세의 고행주의가 그런 전통이다. 또한 동양 역시 사변의 전통이 없지 않다. 노자(老子)나 불교의 전통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동양의 기본자세는 어디까지나 「몸으로」이다.
가령 유심적이라고 보여지는 불교에서도 그들의 선(禪)적인 명상이 몸의 훈련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기에 몸의 자세를 강조하고 호흡과 각(覺)의 세계를 직결시키고 있다. 따라서 동양에서의 「힘」은 소위 정신적이거나 의지력이 아니라 몸의 힘이다. 지능의 발달과 거기에 따르는 고도화된 과학의 힘에도 불구하고 인간 개체가 극도로 나약해져 감을 깨달은 서구인들이 동양을 기웃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요즘들어 부쩍 선(禪)이라든가 요가에 관심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오늘으 그리스도교는 몸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머리, 팔, 다리가 제각기 움직인다. 머리로 신학하고 영으로 예배할 뿐, 삶에로의 전인적인 통전이 없다. 그러기에 신앙없는 신학자가 존재하고 신학없는 목회자가 버젓하다. 이들이 바로 전형적인 이원론자들이다. 이것은 신앙과 신학을 삶을 통해 몸으로 통전하지 못한데 따른 필연의 자기분열이요, 자기소외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신학도들은 신학이라는 미명하에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고 그 신학함을 능멸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냉정히 따져 보아야 한다. 신학함의 엄숙함, 신학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경건함은 바로 이러한 자성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재점검되어야 한다. 또한 신학하는 자가 겸손해야 하고 수줍어 해야 하는 까닭도 감히 그 누구도 자기가 참된 신학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참된 신학을 살기 위해 목을 내댈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참된 것을 때 한하여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