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15 09:45

해방을 위한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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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위한 봉사
행 3:1-10

in: 1992. 11. 23. 총회사회부 [교회와 사회]

원래 선천성 불구였던 본문의 앉은뱅이는 어떤 고마운 사람들이 날마다 그를 성전문 어귀에까지 메어다 주어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러던 어느날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성전에 들어가려다 구걸하는 그를 보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치며 잡아 일으키자 놀랍게도 그가 정말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는 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의 처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비극은 무엇보다도 홀로 걸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움직이려면 언제나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햇다. 그의 이 불행은 그로부터 모든 희망을 앗아갔다. 그런 그에게도 굳이 어떤 바램이 있다면 그저 굶지 아니하고 그날 그날의 구복을 채워 연명하는 것이다. 그라고한들 왜 한 때는 자기 운명에 저항하는 몸부림이 없었겠는가?그러나 언제부턴가는 자기의 그 불가항력적인 숙명에 지쳐서 체념을 거듭하는 동안 이제는 오히려 그런 삶에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이제 숙명론자가 된 셈이다.

본디 숙명론이란 약자가 터득한 삶의 지혜가 아니라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보다 편리하게 다루고 부리기 위해 만든 통치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도 여기에 가담하여 오랫동안 공범자 노릇을 해왔다. 불행에 억눌려 신음하는 이웃을 보고도 하나님의 섭리라거나 혹은 죄값이라 하여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앉혔던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라는 설법도 똑같은 강자의 지배논리이다. 이같은 숙명론을 설득하기 위해 그들은 흔히 합리적, 현실적이라는 도그마를 사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념이라는 독을 뿌렸다. 합리적이요 현실적이라는 말은 기존질서는 불가항력적이라는 협박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체계, 권력구조, 경제체제 등이 온갖 마력적인 지식과 선전도구를 망라하여 지금의 상태가 가장 합리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현실이라고 떠들어 댄다. 따라서 이런 선전에 세뇌된 현대인들은 자기의 앉은 자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여 오로지 이 불가항력적인 현실에 순응하는 길만이 내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점점 고유한 자기를 잃어가는 중에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합리적, 현실적인 설득법의 특징은 비전이나 희망은 없고 오직 현재만이 전부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외친다. 하나는 기적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망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은 앉은뱅이가 걸으려는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황당한 망상이 된다. 왜냐하면 기적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턱없이 기적을 바라기 때문에 죄악이 된다. 그렇다고 그냥 드러 누워서 죽기를 각오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절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무래도 현재가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는 그저 남의 손에 이끌려서 적당한 자리에 앉아 구걸하며 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왜 기적이 없다는 것인가? 거짓말이다. 그것은 인과율만이 현실의 전부라고 믿고 그 위에다 오늘의 질서를 구축한 자들의 거짓말이다. 실은 앉은뱅이를 성전 입구에다 매일같이 업어다 주었던 자들이나 성전을 드나들면서 푼돈을 떨어뜨려 겨우 그를 연명하게 했던 자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소위 전능하다는 신에게 예배하기 위해 성전을 드나들면서도 저 앉은뱅이는 조상의 죄값으로 저렇게 되었으니 영원히 앉아있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제 발로 걷거나 뛰게 되어 그들과 나란히 성전에 들어가게 될 기적 따위는 아예 믿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까지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이 빠뜨릴려고도 않았기 때문에 적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다. 그들은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들에게 놓여남을 주는 것이 곧 복음의 위력이요 현실적인 구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닢 동전을 뿌려주기 보다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쳤던 것이다. 사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당장 걷고 뛴다면 확실히 그것은 이날까지의 모든 질서의 아성이 무너지는 사건인 게 틀림없다. 따라서 기존 질서에 제 자리를 가진 자들에게는 그런 기적이 달가울리 없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 인간의 모진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분이다. 실제 복음이 제대로 들어간 사회나 개인에게는 언제나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남이 업어다 놓은 자리에 앉아서 하루 하루의 빵을 구걸하며 살던 내가 정말 예수를 바로 만났다면 그 숙명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자유인의 기상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성전 문턱에나 앉아 뭉그적대며 그 자리를 이용이나 하려는 앉은뱅이 신세나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정말 예수의 사역자들인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첨병들인가? 어두운 숙명에 붙잡힌 불행한 이웃들의 해방에 봉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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