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3 09:24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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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오후 탄천변을 걷다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예보가 있었던 터라 나름 빨리 다녀 올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옴팡 뒤집어썼습니다. 

비에 젖은 모습은 처연합니다. 

어디 마른자리에 앉지도, 가만히 서 있기도 뭣해 그저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다리 밑을 서성이다 빗방울이 좀 잦아들 무렵 돌아왔는데 소나기는 무더운 여름철에 맞아도 으슬으슬 한기가 들 만큼 찹니다. 

덕분에 밤에는 가볍게 열이 오르고 두통에, 목까지 아파 새벽이 되자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거 코로나 아니야?>

결국 월요일 오후 처음으로 선별 검사소를 찾았습니다. 

긴 검체 채취 면봉을 콧구멍 깊숙이 밀어 넣고 휘휘 저을 때는 불쾌했지만 그래도 이튿날 아침 <조성노님은 8월 9일 코로나 PCR 검사 결과 ‘음성(이상 없음)’입니다>라는 문자를 받고 나자 안도감과 함께 받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검인정 교과서에도 나온다던데 저희 때는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그것도 전문이 아니라 토막 난 지문으로 실린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가 제 인생의 첫 소설이었습니다. 너무 감미롭고 어린 마음에도 구구절절 와 닿아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까지 거의 다 외다시피 했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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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런 개울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로 시작되는 <소나기>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순수하고도 가슴 아릿한 사랑을 가장 간결하고도 절제된 언어로 펼치는 수채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문득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내려다 보았다. 물기가 걷혀 있었다. 소년은 그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었다.>

<숨어서 내가 하는 꼴을 다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물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소녀가 허수아비 줄을 잡더니 흔들어댄다. 허수아비가 우쭐거리며 춤을 춘다. 소녀의 왼쪽 볼에 살포시 보조개가 패였다.>

<소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수수밭 쪽으로 달려갔다. 세워 놓은 수숫단 속을 헤집어 보더니 소녀 쪽을 향해 손짓을 한다.>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소년이 등을 돌려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 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오자 소녀가 ‘어머나’하고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혼잣 속으로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 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에 그리 안타까울 것도 없었건만 소년은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의 썸 타는 얘기가 비록 소녀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소나기>는 오래 기억될 우리 모두의 소중한 추억이자 풋풋하고도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소설이 구태여 이름을 붙이지 않고 <소녀>와 <소년>이라며 보통명사를 쓴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한 때는 그 <소녀>고 그 <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나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시린 추억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아무리 초췌하고 피폐해졌다 해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순수하고도 아름다웠던 옛 추억이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연일 쏟아지는 확진자 수에 불안감을 넘어 공포감마저 드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한 바탕 소나기가 쏟아지고 나면 하늘에 아름다운 오색 무지개가 뜬다는 사실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한여름 소나기처럼 <코로나19>도 그렇게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