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5 19:35

<미나리>를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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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없는 미나리 맛 같은 영화, 무공해 친환경에다 절대 트릭이나 과장, 비약, 반전이 없는 영화, 큰 스케일과 현란한 영상미, 막장 드라마에 익숙한 현대 관객들의 눈에는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저예산 독립영화, 그럼에도 가슴 절절한 공감과 왈칵 눈물을 쏟게 하는 어느 애틋한 한인 이민가족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요즘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가난하고 힘들고 여유롭지 못해도 <가족>이 전부였습니다. <가족>이 우리 모두를 악착같이 살게 하고 부지런하게 하고 굳세게 한 동기부여의 원천이었습니다. 

미 교포 2세라는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도 바로 그런 가족 영화입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 한 가족의 서사가 이렇듯 흡인력을 가지고 2시간 동안이나 지루함 없이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고 가는 것은 역시 출연 배우들의 힘을 뺀 전혀 연기 같지 않은 연기의 힘 때문이지 않나 합니다. 

윤여정의 연기가 그랬고, 한예리며 아역 배우가 그랬습니다. 실제 한 가족이듯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는데, 특히 손주 역으로 나온 어린 앨런 킴의 연기는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독립영화의 여러 한계들조차 다 커버한 배우들의 그 명품 연기가  가난한 영화를 한 편의 진솔한 시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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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났다는 정이삭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했는데 영화의 배경이 된 아칸소 시골 마을도 정 감독이 실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고 합니다. 

척박한 땅 어디서나 물만 있으면 잘 자라는 한국의 질긴 채소 <미나리>처럼 가족은 매번 모진 위기들을 잘 이겨냅니다. 만약 영화가 처음부터 욕심이나 큰 포부를 가지고 출발했다면 아마도 이런 잔잔한 감동과 설득력을 전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미나리>는 꿈과 희망을 섣불리 낭만화하거나 지나치게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그 지극히 사적인 가정사를 어떻게 많은 이들의 가슴에 저 마다의 의미로 가 닿게 할 것인가를 가장 아름답고도 따뜻한 방식으로 고민한 작품입니다. 

특히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는 할머니의 존재에 대한 묘사가 섬세합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손주 데이빗이 처음에는 <한국 냄새>가 난다며 할머니와의 대면을 피해 엄마 뒤에 숨고, 할머니가 입으로 군밤을 까주자 더럽다며 먹기를 거부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새 손주는 할머니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있습니다. 

<미나리>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국 영화임에도 그 사회의 주류인 백인들의 시선은 전혀 고려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은 채 오로지 한국적인 정서와 문화, 한국인의 미나리 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전하는 데만 집중합니다. 

미국으로 이민 가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고 있는 딸을 돕겠다며 한국에서 멸치며 고춧가루, 한약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가 딸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장면이라든가, 자신의 실수로 불을 내고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죄책감과 허탈감에 어디론가 홀로 떠나려는 할머니를 아이들이 붙잡는 장면은 누구나 눈물을 훔치게 하고, <우리네 모든 할머니께 바친다>(To all our grandmas)는 엔딩 크레딧도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CNN은 <겸손하면서도 가장 성공적으로 가족애를 구현한 영화>라고 평했는데, 지난해 <기생충>에 이어 올해도 4월 25일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기대해 봅니다.

바야흐로 봄 향기 가득한 미나리의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