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30 22:00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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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아들 군복무 특혜 시비로 여야가 한창 논란을 벌이고 있을 때 벨기에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18세의 엘리자베스 공주가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군사훈련을 받는 사진이 보도돼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공주는 전혀 특별대우를 받지 않고 다른 훈련병들과 똑같이 진흙탕을 기며 포복을 하고, 철조망 장애물 넘기며 외줄타기 도강, 사격훈련까지 다 받았습니다. 툭하면 논란을 빚는 우리 사회 지도자 자녀들의 특혜 시비와 반칙을 생각하면 신선하다 못해 몹시 부러운 뉴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난 달 초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외교부의 해외여행 자제권고도 무시하고, 또 단군 이래 최초로 추석 귀성까지도 포기한 채 집에 갇혀 지내는 절대 다수 국민들의 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12만 달러짜리 요트를 구입해 미국 동부 해안에서 카리브해까지 여행할 계획이라며 출국을 강행했습니다. 출국장에서 <공직자 가족으로서 부담이 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일병 왈 <다 내 삶을 사는 건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건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했고, 여당은 강 장관 자신이 아닌 배우자일 뿐이고, 또 남의 사생활을 침해한 언론의 부적절한 취재가 더 문제라며 반격했습니다.


지위가 높고 부와 권력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사회적, 도덕적 책무에 더 충실하고 솔선해야 한다는 서구의 오랜 전통을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합니다. 이 덕목의 기원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1337-1453)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도버해협에 인접한 소도시 <깔레>(Calais)를 포위하고 1년 가까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결국 깔레는 식량이 바닥나고 지원군이 끊기면서 1347년 항복을 선언합니다. 에드워드 3세는 깔레의 항복을 접수하며, <그러나 누군가는 그동안 영국군에 입힌 피해를 책임져야 한다>며 교수형에 처할 6명의 시민을 깔레가 스스로 선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시청 앞 광장에 모인 깔레 시민들이 깊은 고뇌에 빠져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놀랍게도 당시 깔레의 최고의 부호로 알려진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시장인 <장데르>, 법관인 <피에르 드 위쌍>과 그의 아들, 그리고 또 다른 시의원 두 사람이 나서 희생제물 6명을 모두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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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당일 6명의 교수형 자원자들이 자신이 달릴 밧줄을 목에 건 채로 형장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형을 집행하려는 그 마지막 순간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의 형 집행 정지 특명이 내려져 그들 모두가 극적으로 죽음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우선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그 교수형 자원자들의 면면을 보고 받고 그들의 희생정신과 책임의식에 감복했고, 다음은 왕비였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만약 지금 저들을 처형하면 자신이 임신한 아기에게 어떤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며 왕에게 간곡히 선처를 호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유명한 역사적 사건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이 유래된 것입니다. <노블레스>란 닭 벼슬, <오블리주>란 달걀의 노른자를 가리키는데 이 두 단어가 합성되어 <닭의 사명은 자신의 벼슬을 과시하는 데 있지 않고 알을 낳는 데 있다>는 뜻으로 한 사회의 지도층은 남의 존경과 대접을 받고 명예를 누리는 만큼(노블레스) 반드시 남다른 도덕적 책임(오블리주)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구 사회의 오랜 전통은 가진 자, 지도층이 더 많이, 더 엄격하게 책임을 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많이 가진 자나 지도층, 권력가일수록 더 이기적이고 더 무책임하고 더 초법적, 특권적, 반칙적이라는 데 다수 보통 사람들의 심한 좌절과 절망이 있습니다. 


어느덧 찬바람 부는 11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영원한 모범이신 주님을 생각하며 올 연말에도 나보다 더 힘든 이웃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