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1 23:07

루터와 감염병

조회 수 152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 종교개혁의 산실이자 대학 도시인 비텐베르크(Wittenberg)까지 강타해 이미 대학의 강의며 학생들 대부분이 다른 도시로 피신한 1527년 7월 12일 주일 아침, 루터는 동료 교수인 유스투스 요나스, 그리고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담임목사 요하네스 부켄하겐과 남은 학생, 교인들 앞에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치명적인 감염병을 주셨을 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재앙을 막아 주시도록 주께 기도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집에 연기를 피우고, 환기를 시키고, 관청에서 나눠주는 약을 먹으며,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가지 않고 피했습니다. 자칫 내가 남에게 전염 시킬 수도 있고, 나도 감염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의 그런 사소한 부주의가 이웃을 해치는 큰 비극을 부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저는 흑사병과의 싸움을 위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갈 것입니다. 이웃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사람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서 무슨 일이든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의 참 모습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은 어리석거나 맹목적이거나 뻔뻔하지 않으며, 남을 선동하거나 미혹하여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루터는 자신의 집과 수도원을 임시병원으로 개조하여 환자들을 수용하고 치료했고, 또 그 현장에서 친구와 자신의 자녀가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절망적인 경험과도 마주해야 했습니다. 루터 시대의 중세는 흑사병으로 온 유럽이 초토화될 만큼 위기적이었습니다. 



스크린샷 2020-09-11 오후 11.06.49.jpg





아버지의 권유로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루터가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을 접합니다. 주말 부모님을 찾아뵙고 친구와 함께 다시 대학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드넓은 벌판이 캄캄해지며 폭우가 쏟아지고 무시무시한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옆에서 함께 걷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새까만 숯덩이로 변한 것입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루터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저를 지켜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그게 1505년 7월 2일이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루터의 두 동생인 하인츠(Heintz)와 바이트(Veit)가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루터의 서원을 알고 아버지 한스 루터가 미친 듯이 분노하며 만류했으나 두 동생의 죽음까지 겪은 루터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전격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루터의 흑사병과의 비극적인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수녀 출신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한 루터는 아들 셋, 딸 셋의 자녀를 두는데 1527년 비텐베르크에 흑사병이 창궐할 당시 첫째 딸인 엘리자베스를 잃습니다. 루터는 엘리자베스가 고통하며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 그 침대 앞에 엎드려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 저는 제 가여운 딸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 아이를 데려가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사랑하는 딸 엘리자베스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기나이다.>


따라서 감염병에 대한 루터의 입장과 신념은 몹시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루터 시대에도 <감염병은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므로 피해 달아나거나 맞서는 것은 곧 불신앙이므로 그냥 묵묵히 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요한 헤스(Johann Hess) 목사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며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신뢰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불이 났는데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앉아서 당할 텐가? 물에 빠졌는데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그냥 익사할 텐가? 흑사병조차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감염을 적극적으로 막거나 힘껏 예방하지 않고 전파를 방조하고 방역을 훼방하는 행위는 마귀의 사역을 돕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감염을 피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멀리 달아나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권면으로 그의 방역 가이드라인을 마무리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역량과 능력으로 감염병을 최대한 억제하고 퇴치해야 할 큰 책임이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를 만큼의 모험적이고 또 대담한 결단도 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혹 나의 무지와 태만, 교만, 경솔한 행위로 이웃이 고통 받지 않게 하라. 어디서든 나를 필요로 한다면 소방수처럼 달려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