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8 09:54

에케 호모

조회 수 178



<에케 호모>(Ecce Homo)란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의 라틴말로 주님을 재판할 때 빌라도가 한 말인데(요 19:5), 니체가 이를 차용해 자기 자서전의 표제를 삼으면서 더 유명해진 말입니다. 


빌라도는 주후 26년 제5대 총독으로 유다에 부임해 10년간 재임한 로마제국의 관리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에 의하면 <그는 절대 굽힐 줄 모르는 사람으로 앞뒤를 가리지 않으며 폭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재판도 없이 죄수들을 처형하는 등 끝없이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엽기적인 사건, 즉 빌라도가 툭하면 봉기하는 갈릴리 사람 몇을 본보기로 살해하여 그들의 피를 성전의 제물에 섞었다는 말씀을 보면 그 얘기도 전혀 근거 없는 모함만은 아닌 듯합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이 주님을 끌고 와 송사하자 빌라도가 일단 유대인들의 참소 내용을 법에 비춰봅니다. 그러나 이렇다 할 혐의점이 없자 그 소를 기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즉각 반발하며 더욱 공세를 취합니다. 자칫 폭동이라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빌라도가 당황하며 다시 주님을 심문합니다. 그러나 이번 역시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 18:38)며 무죄를 선언하는데, 사태는 더욱 험악해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들의 외침이 빌라도의 법정을 뒤흔들었습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또 하나의 카드를 제시합니다. 소위 정치적 협상을 꾀한 것인데 일단 주님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대신 유월절 특사로 방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마저도 거부하며 차라리 복역 중인 유명한 강도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외쳤습니다. 마침내 빌라도가 최후의 융화책을 시도합니다. 주님께 붉은 왕복을 입히고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운 후 군중들 앞에 끌고나와 온갖 희롱과 묘욕을 다 당하게 함으로써 사태의 반전을 기대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곧 유대인들이 친 마지막 그물에 걸립니다. < 왕이라는 자를 놓으면 황제를 반역하는 것이다>(요 19:12). 빌라도는 이제 자신이 반역자가 아니라 황제의 충신임을 증명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니라>(요 19:16). 빌라도는 그렇게 함으로써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 거짓된 유다 군중의 충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황제의 충신으로 남기 위해 로마제국의 법, 황제의 법을 유린하고 모독했으며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해 유다 군중의 악의를 대행한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유다 군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황제의 추종자들도 아니면서 <황제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요 19:15)며 악을 썼습니다. 이 추태, 이 비굴, 그들은 오로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매수와 선동에 놀아난 하수인들일 뿐이었습니다. 






DP816601.jpg

<Ecce Homo, Albrecht Dürer, ca. 1498-99>


<이 사람을 보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렇듯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시며 도리어 정치권력의 허구를 폭로하셨고, 유대인들의 송사를 당하시며 도리어 종교권력의 기득권을 심판하셨습니다.

 

요즘 4.15 총선을 앞두고 벌이는 정치 야바위판을 보십시오. 

선거법을 희한하게 고치더니 자고나면 뚝딱 비례정당, 위성정당, 꼼수정당, 형제정당들이 다투어 개점하고 마치 순간이동, 공중부양을 하듯 하룻밤 사이에도 이 정당 저 정당으로 공간이동을 하는가 하면 의원 꿔주기, 꼼수제명에 꼼수 탈당까지 온갖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몰염치가 다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렇게 편법을 쓰고 기상천외한 꼼수를 부리다 표심이 돌아서면 어쩌나, 하루가 다르게 말 바꾸기를 하다 역풍을 맞으면 어쩌나 하는 따위는 신경도 안 씁니다. 어떤 짓을 하건 일체 사과도 없고 굳이 국민들을 설득할 필요도 못 느낍니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아예 모두가 안면 몰수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습니다. 

거기에는 다 그들이 굳게 믿는 미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완벽하게 양대 진영으로 재편됐고, 그게 다시 지난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더욱 견고한 프레임으로 고착 됐기 때문에 자신들이 꽂는 깃발이 어떤 것이든, 또 그 주자가 누구든 지지자들(팬덤)은 무조건 우르르 몰려들게 되어 있다는 확신과 시뮬레이션, 그게 바로 저들로 하여금 저렇듯 기고만장하게 한 것입니다. 


다음 주일이 벌써 종려주일입니다. 

<에케 호모>의 계절인 이 사순절 막바지, 부디 주님이 종교적 기득권에 안주하여 부패한 교회 권력과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사악한 정치권력 모두를 제대로 심판해 주시길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