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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의 진정한 선구자로 알려진 월북시인 김기림의 시에서는 마치 은빛 겨울바다를 담은 캔버스에서 파도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까마득히 잊혀진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막 되살아나는 듯도 합니다. 그는 삼월이 다 가도록 여전히 오지 않는 봄, 쉬 물러가지 않는 겨울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아모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여린 날개가 물결에 젖어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이것은 단지 계절의 풍경화가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나비란 달이 바뀌면 으레히 봄이 오겠거니 하는 우리의 <순진함>이며, 때가 됐건만 꽃이 피지 않는 삼월의 바다란 우리의 그런 순진함을 비웃는 거친 세상의 <영악함>입니다.


파란 것만 보면 무조건 청무우 밭인가 하여 내려앉았다가 그만 사납고 차가운 파도를 흠뻑 뒤집어쓰고 오늘오들 떨고 있는 나비, 우리는 지금 만월까지는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저 삼월의 바다 위로 무심히 떠오르는 <시린 초생달>을 바라보며 뼈저리게 깨닫고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잊어버린 또 하나의 별의 이름>이라는 긴 제목의 시집은 김기림의 시 모음집입니다. 갈릴레오는 중세의 암흑시대를 과학의 이름으로 돌파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정직한 천체의 모습을 보여주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별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별입니다.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대니얼 디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작 <흑사병 해의 일지>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모든 것을 자세히 기록해 두는 것은 혹시라도 후세에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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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혼란하고 불안했던 당시에도 이미 그런 재앙이 거기서 끝이 아니란 걸 알았던 작가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온갖 헛소문과 그로 인한 패닉, 재앙을 이용한 돌팔이 사기와 나라간의 무역 갈등, 도시 폐쇄, 의심환자 강제 감금, 탈출과 은폐로 인한 감염 확산 등 지금의 <코로나19> 사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혼란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가운데서 작가는 그때도 능동적인 자가 격리자들만이 살아남았다고 전합니다. 


흔히 불안한 마음은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들곤 합니다. 낙담하지 맙시다. 스스로 생의 기운을 꺾지 맙시다. 남의 절망을 도와주며 힘껏 서로의 삶을 격려합시다. 삼월의 바다가 아무리 시리다 해도 봄은 이제 지척입니다. <희망>이 바로 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또 하나의 잊혀진 별의 이름>인 것을 기억합시다.


솔로몬은 처음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돌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을 막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와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7-39).


우리 모두 살아남아 다시 보게 되기를, 

다 마스크를 벗은 맨 얼굴로 따뜻한 봄을 맞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