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8 09:33

과정의 정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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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전 <혁명가를 사랑한 왕비>, <세상을 뒤흔든 치명적인 왕실 비화> 등의 부제를 달고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됐던 니콜라이 아르셀 감독의 덴마크 영화 <로얄  어페어>(A Royal affair)는 18세기 덴마크 사회의 개혁의 열망, 경제적 양극화, 교회와 특권층의 극단적인 보수화, 개혁 세력들의 도덕적, 윤리적 한계와 모순 등이 뒤엉켜 현 우리 사회를 연상케 할 만큼 치열한 현실적 공감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절대 왕정이 무르익어 가던 18세기 덴마크 왕실, 왕인 <크리스티안 7세>는 나약하고 편집증까지 보이는 정신병자인 반면 무려 스무 살이나 연하인 왕비는 지적이고 우아했으며 더구나 당시 유럽을 휩쓴 계몽주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부패한 귀족들과 관료들은 농민들을 쥐어짰고, 거리는 더럽고, 백성들은 모두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한편 왕의 무능을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던 귀족들이 왕의 광기를 더는 감당할 수 없어 그를 치료할 독일인 의사 <요한>을 선발합니다. 

덴마크 궁전의 파란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그 독일인 의사는 그저 평범한 주치의가 아니라 계몽주의 철학자였고 뛰어난 설득력과 정치 변혁의 의지를 가진 개혁가였습니다. 그는 왕을 설득하여 태형제도를 철폐하고, 보육원을 설치했으며 접종 시스템을 도입, 의료개혁도 과감히 추진해갔습니다. 조세 제도도 대대적으로 혁파하여 귀족들의 특권을 해체해 나갔고, 각종 검열제를 없애고 표현의 자유를 확대해 백성들의 권리를 최대한 옹호하는 정책을 펴게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요한은 진보적 사상과 파격적인 개혁 법안으로 국교회와 귀족들로부터는 극심한 견제를 받았지만 루소와 볼테르를 읽으며 계몽주의에 흠뻑 빠진 왕비 <캐롤라인>과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왕비와 요한의 관계를 눈치챈 기득권 세력들이 그것을 빌미로 강력한 반격을 시도해 마침내 개혁을 좌초시킵니다. 의사 요한은 단두대에 목이 잘리고, 왕비 캐롤라인은 왕궁에서 쫓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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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얄 어페어>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18C 덴마크 정치, 사회 혁명의 과정과 함께 그 처절한 계몽사상의 낭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덴마크의 개혁의 단초는 계몽주의의 실현으로 백성들을 절대 권력의 굴레로부터 해방하고 그들의 권리와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자는 취지였지만 결국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개혁의 정직성과 도덕성은 흔히 기능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더 쉽게 간과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사회가 반드시 사필귀정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대목입니다.

어느 시대나 개혁을 통한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치명타는 역시 개혁 세력의 비리와 도덕적 결함에 있음을 깊이 명심할 일입니다. 


혹 현 문재인 정부도 <대의를 위해서는 부분적인 과정의 하자쯤은 불가피하다>는 신념에 젖어 있다면, 저는 꼭 18C. 덴마크의 실패한 개혁사인 이 <로얄 어페어>를 한 번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언제나 개혁 주체들의 그릇된 자신감과 오만, 과정의 부당성이 개혁 그 자체를 <단두대>에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