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상(像)은 슬퍼하고 사랑하고 진노하고 후회하는 참 변화무쌍한 신입니다. 사실 이런 신의 모습은 동양적인 신관에서 보면 대단히 비속한 것입니다. 하늘은 자고로 초연해야 합니다. 인간의 슬픔이나 기쁨, 패배나 승리 따위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이미 신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끝끝내 신비에 싸여 있는 것이 동양의 초월자입니다. 인간이 도통한다는 것도 바로 신과 같은 그런 초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성경의 하나님은 여간 범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그 범속성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게 곧 인간과 더불어 산다는 증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엄마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품어주고, 울면 달래고, 끝끝내 고집을 부리면 내버려두거나 때려주고 그러다가 다시 끌어안는 엄마! 그것은 어린 자식을 중심으로 사는 엄마이기에 그렇습니다. 엄마가 변덕스럽다면 어린 자식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오는 변덕입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은 그런 하나님이 아예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합니다. 주님이 바로 순수 인간이 되신 초월자라는 것입니다. 



2105873205_f009f072_BCF6B0A1BCBABFA9C0CE-BFECB9B0B0A1.jpg



한번은 그분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다 목이 마르고 시장하사 야곱의 우물가에 걸터앉으셨습니다. 분명 초월자였으나 배고픈 줄도 알았고, 피곤하고 목마른 줄도 알았던 너무나도 인간적인 초월자였습니다. 그런 분이 마침 우물에 물 길러 나온 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며, <지금 물을 달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도리어 그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고 그가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요 4:10)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생수를 줄 수 있는 분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지금 내게 물을 구걸하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렇게 유한 속에서 무한을,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를 만나는 파라독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에 내민 손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찾는 건 도리어 그로부터의 도피일 뿐 결코 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내 편의 신이!>

이것은 스스로 무신론자, 허무주의자를 자처한 어느 시인의 독백입니다. 그는 허무주의를 표방함에도 자신의 소원에 대해 그렇게도 분명할 수가 없습니다. 내 편이 되어 달라는 것은 이미 자기의 욕구가 그만큼 확실하다는 뜻 아닙니까? 

따라서 그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독거미 같은 에고이스트며, 지금 나와 마주 선 이웃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소경이 된 자에 불과합니다. 


먼 데서 찾지 마십시오. 지금 내게 <물을 좀 달라!>하는 나그네에게서 새롭게 성탄하실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은 언제나 낮은 자리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구걸하는 나그네 행색으로 다가오사 내게 <물을 좀 달라!> 하십니다.

빈 방이 없다며 찾아오신 주님마저 외양간으로 내몬 베들레헴의 어느 여관 주인마냥 올해도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찾아오실 주님을 문전박대하는 성도가 없길 간절히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