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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 18).

 

지독한 역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합니다. 

따라서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낙관한 것이 아닌가 현실을 지나치게 만만하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삶이란 결코 기뻐하고 감사할 일만이 아니라 오히려 억울하고, 안타깝고, 속상하고, 아쉬운 일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고, 또 남이 우는데 나만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도 자칫 삶을 조롱하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도 기쁨이나 감사보다는 늘 고난과 아픔을 더 많이 의식하며 산 사람입니다. 그는 우선 모진 병을 지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떤 병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몸을 찌르는 가시>와도 같은 것이었고, 육체적 고통을 넘어 영적인 위축까지도 느끼게 한 <사탄의 사자>(고후 12:7)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의 눈에 그 병이 하나의 저주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너희를 시험할 만한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너희가 나를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나를 영접하였도다>(갈 4:14).

 

뿐만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와의 관계도 바울을 몹시 힘들게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를 쓸 무렵, 교회 내부에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들이 많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것은 역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편지는 힘이 있어 좋으나 실제 대하면 외모가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 10:10)며, 자고로 하나님의 사람이란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외적 권위와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바울에게는 그게 부족하다면서 사도성을 의심했는데 놀랍게도 바울은 말이 부족하다는 그들의 지적을 솔직하게 접수합니다(고후 11:6). 그러나 그것은 케제만이나 라이헨슈타인 같은 학자들의 지적처럼 주술적인 웅변술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헬레니즘의 신비주의적 언변이 없었다는 뜻이지 지식이나 논리가 부족했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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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뿐입니까? 바울이 <기쁨의 서신>인 에베소서와 <감사의 서신>인 골로새서를 쓸 때는 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로서 로마 감옥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의 생애에 가장 힘들고, 가장 외롭고, 가장 처절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기쁨>과 <감사>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바울은 갈라디아서 4:19에서 <출산의 고통>을 얘기합니다. 출산은 <하늘이 노래질 만큼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게 절대 즐거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즐겁지 않고 고통스럽다고 기쁨마저도 없다는 얘기는 아니며 감사하지 않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죽도록 아프고 고통의 극한까지 가는 일이지만 또 세상에서 출산보다 더 기쁘고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고통과 기쁨, 아픔과 감사는 얼마든지 동시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만 있으며 그게 비록 하늘이 노래지는 일이라 해도 우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 즐거움은 앗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쁨과 감사는 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가득 채우면 그 부모는 어떤 희생이나 고난도 다 기쁨과 보람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진정한 기쁨과 감사는 주님이 내 존재를 가득 채울 때 발생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이의 매, 사랑하는 이의 분노, 사랑하는 이의 강요에 쫓기는 희열도 느낄 줄 알아야 비로소 우리도 바울이 말한 그 <역설의 기쁨>과 <전천후의 감사>를 제대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